[돋을새김] ‘바이든’만 아니면 된 건가

이영미 2024. 1. 30.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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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영상센터장


온 나라가 단어 하나를 특정하지 못해 몸살이다. 대한민국 ‘넘버 원’ 공인이 카메라가 쉴 새 없이 도는 공적 장소에서 참모에게 건넨 말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는 1년 넘도록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발언 당사자가 살아 있고, 그가 국민에게 뭐든 설명할 의무가 있는 현직 행정부 수반이고, 무엇보다 발언 순간이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도 그렇다. 물어볼 수도 없다. 기회도 없고, 답도 안 한다. 당사자 해명은 초창기 한 번. 도어스테핑에서 질문받고는 “진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답한 게 사실상 전부다. 그날의 진상을 본인 말고 누가 밝힐 수 있다는 건지. 그 뒤로는 시중에 전언만 흘러 다니는데 그나마도 결론이 없다. 이 모든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이상한 일인가.

우리 사회가, 정치와 행정과 사법이, 전문가와 언론이 얼마나 답 없는 교착과 무기력 상태인지는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사건이 웅변한다. 사건 당시 상식 수준에서 분명해 보였던 대통령의 사소한 말실수는,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낯 뜨거운 변명과 말꼬리 잡기를 거치더니 금세 정치적 대치의 주제가 돼 버렸다. 보통 사람은 이제 참견도 쉽지 않다.

쐐기를 박은 건 법원이다. 전용기 타고 외교하러 간 대통령 발언은 이번 재판을 거치면서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 진실 여부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단계에서 법원이 판단해야 하는 과학적 사실의 진실성’에 관한 문제로 바뀌었다. 법원이 사건을 그렇게 규정해 버렸다.

2022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후 대통령실부터 외교부, 여당, 140여곳 방송사, 음성분석 전문가, 종국에는 사법부까지 나서 바이든/ 날리면 미스터리에 매달린 끝에 내린 결론은 ‘모르겠다’였다. 과학까지 끌어들이고는 모른다니. 이것만도 허탈한데 1심 판결은 한발 더 나간다. 윤 대통령이 ①바이든은/ 날리면 중 무슨 말을 했는지는 ‘판독 불가’지만 ②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향해 욕설과 비속어를 썼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한 말은 모르지만 어쨌든 ‘바이든은’만은 아니라는 거다.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이 XX들이 승인 안 해…쪽팔려서’라는 말은 전후 맥락·국회라는 단어 등을 고려하면 대한민국 국회를 상대로 발언했다고 해야 자연스럽고, 둘째 옆에서 들은 사람이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들은 그 사람’은 이 일로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던 당시 외교부 장관을 가리킨다. 외교부는 소송 당사자. 맥락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법원이 원고의 발언을 주요 근거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는 건가. 곤혹스러운 상황이긴 하다. 하필 들은 사람이 소송 당사자니.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원고 답변을 근거로 삼을 정도였다면 발언 당사자에게 직접 진술을 들을 수는 없었을까. 말한 사람에게 묻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나. 이 간단한 해법은 우리 사법 시스템상 절대 불가능한 절차인가. 만약 안에서 안 된다면 법원 밖에선 질문이 가능한가.

최종 판단은 상급심에서 내려질 모양이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간다고 한들 법원이 묻지 않는 한 바이든/ 날리면의 진실이 밝혀질 리는 없다. 후대 역사책이라고 기록할까. 그럴 것 같지도 않다. 대통령이 동맹국 대통령과 자국 국회 중 누구를 비난했는지가 역사가의 주요 관심사가 될 리도 없다. 무의미한 소극, 영구 미제 신세다.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사법부의 엄밀한 검증을 거치고 보니 우리 사회 병목의 진원이 선명해졌다. 사실과 주장이 생성되고 흐르고 배출되다 갈 길을 잃고 꽉 막혀버린 곳. 여기만 뚫으면 많은 것들이 해결될 그곳. 다수에게는 새삼스러운 문제의 근원을 대통령 본인이 너무 늦지 않게 발견했으면 좋겠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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