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윤석열-한동훈 충돌 감상문

서승욱 2024. 1. 30.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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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여당의 총선 예비 출마자 중에 윤석열 대통령이 아닌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찍은 사진으로 홍보물을 채우는 이가 많다. '검찰총장 윤석열'을 구세주처럼 띄웠던 이들도 "미래는 한동훈"이라며 미련 없이 사진을 바꿨다. 강자 뒤에 줄서기는 여의도, 특히 국민의힘엔 본능 수준의 관성이니 윤 대통령도 "그러려니" 해야 마음이 편하겠다. 어차피 지지율 낮은 윤 대통령 이미지를 씻어내 심판론을 누르는 게 여권의 총선 제1 전략 아닌가. 국민의힘이 목을 맸던 '검사 윤석열'의 자리를 '검사 한동훈'이 전략적으로 메우는가 싶더니 둘 사이에 난데없는 활극이 벌어졌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허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들은 "저게 저렇게 싸울 일인가" 어안이 벙벙했지만, 흥행 요소는 꽤 있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이란 휘발성 소재, 한 위원장이 캐스팅한 김경율 비대위원의 도발적 대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후배… 가장 아끼던 사람에게 바보같이 뒤통수"(채널A 보도)란 선배의 격정적 토로, 전소된 서천특화시장 앞 90도 인사 등이었다. 그러나 흥행 여부나 '약속 대련'의 진위를 떠나 작품성은 실망스러웠다. 정치 거물들의 폼 나는 건곤일척과는 거리가 먼 미숙함과 가벼움, 둔탁함이 곳곳에서 돌출했기 때문이다.

끊어 읽기 랩 방식의 연설 도중 한 위원장이 "우리 국민의힘의 후보로서 김경율이 (정청래 대항마로 마포을에) 나선다"며 손을 함께 드는 첫 장면이 특히 어색했다. 공천 경쟁 와중에 "우리 국민의힘 후보"라니, 민주화 이후 어느 당 대표가 이렇게 담대한 퍼포먼스를 할 수 있었나. 분위기에 들뜬 듯한 초보 대표의 질주는 곧바로 역공을 불렀다.

「 검사 출신 현재-미래권력 간 갈등
서초동식 전술이 정치에서 재연
반정치주의가 낳은 우리의 현실

김 비대위원의 명품백 거론이 눈엣가시였던 대통령실은 '사천(私薦)'을 고리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어 대표 사퇴 요구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1일 밤의 '막전막후'를 조선일보는 이렇게 묘사했다. "채널A가 '여권 주류에서 한동훈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대통령도 마음을 굳혔다'고 보도했다. 한 위원장 측은 '용산 핵심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안'이라고 했다… 한 위원장 측은 사퇴를 요구한 사람이 누구라는 사실을 여러 경로로 언론에 알렸다. 당무 개입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는 사안인 만큼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 측 정면 대응에 격노했다."

그날 밤 양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언론에 필사적으로 쏟아냈을 가능성을 거론한 기사다. 특수부 검사들에게 일상화된 언론플레이가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재연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화재 현장에서의 정치쇼"란 야당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지만 갈등 봉합의 과정 역시 정치 베테랑들이라면 피했을 그림이었다. 검사 출신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은 그곳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29일 오찬을 계기로 일단락됐다.

여권 넘버 1, 2의 격돌뿐 아니라 요즘엔 어디를 가나 검사 얘기가 화제다. 이태원 참사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처리와 관련해 검찰총장을 보는 대통령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도 레퍼토리 중 하나다. 법무부 장·차관 인사를 놓고 "각각 누구는 누구 견제용"이란 해석이 붙는다. 현직 검사가 총선에 뛰어들고, 검사 출신의 출마지가 정치권의 뇌관이다. 방송통신도, 금융감독도 전직 검사가 책임지는 세상이다. 검사들의 약진은 검찰 출신 대통령의 존재와 분리해 생각하긴 어렵다. 하지만 근본적으론 한국 사회 반(反)정치 포퓰리즘의 영향도 있다. 정치가의 기본 소양은 타협과 공존, 갈등관리와 통합인데, 국민 정서는 정치인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무턱대고 새 얼굴과 물갈이에만 열광하는 풍토 속에서 정당은 선거 때마다 하늘의 점지를 받은 누구인가를 찾아내려 한다. 검사 정치의 기회도 열린다.

국민들에게서 신뢰를 잃은 기성 정치인들의 책임이 물론 크다. 하루의 정치 경험도 없는 법무장관의 여당 대표 입성에 속수무책으로 안방을 내준 그들의 무기력함과 무능이 유난히 밉고 야속한 요즘이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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