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의 행복한 북카페] 미래를 당겨 보는 자의 슬픔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건 예상치 못한 친구 한 명이 낀 술자리와 같다. 대출하려던 책을 찾다보면 그 옆의 책이 문득 눈길을 끌어 함께 빌려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친구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존재임이 밝혀질 때가 종종 있는데, 조지 엘리엇의 중편소설 『벗겨진 베일』이 그랬다. 『사일러스 마너』라는 책을 읽을 때까지도 나는 이 작가가 필명으로 남성의 이름을 썼다는 것을 몰랐다. ‘조지’는 메리 앤 에번스가 사랑했지만 법적 결혼은 하지 않던 연인의 이름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제인 오스틴만큼이나 중요한 영국 작가다.
『벗겨진 베일』은 독심술과 예지력을 지닌 래티머의 인생을 다룬다. 그에게는 미래의 한 장면을 언뜻 볼 수 있을뿐더러,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이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게 되니 얼마나 염세적으로 변하겠는가. 게다가 미래를 당겨 보는 능력은 결말부터 먼저 읽어버린 책처럼 현재의 의미를 탈색시킨다.
래티머에게 구원은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유일한 사람, 형의 약혼자였다가 자신의 아내가 된 버사 뿐이다. 그러나… 모든 소설에 운명적인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그러나’가 등장한다. 이 소설이 크게는 인간의 이중의식을, 작게는 기혼의 보편적 불행을 그려내는 인상을 주는 것도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얇은 분량에 흥미진진한 고딕 소설이라 단번에 읽히지만, 심리 묘사가 치밀해 잔상이 오래 남는다.
이 작품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2023년에 다비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활판 인쇄 방식으로 만들어져 눈길을 끈다. 손으로 쓸어보면 오톨도톨한 질감이 만져지고 번진 잉크의 느낌이 선명해 글자가 종이에 ‘새겨진’ 느낌이 든다. 1000권 한정판으로 인쇄돼 지금은 구매할 수 없다니, 책이 주는 강력한 물성을 경험하고 싶다면 도서관을 찾아가면 어떨까.
김성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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