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
초등학생인 아들의 일상이 이상하다. 학교에 가져갔던 물통 속에서 흙이 쏟아지는가 하면, 신발 한 짝이 없이 귀가하는 날도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아들을 키워온 엄마는 딱히 유난스러운 사람이 아니지만,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구체적 정황을 확인하고도 가만있을 수는 없다. 차분히 대응에 나선 그를 격분하게 하는 것은, 말로는 사과하면서 정작 문제는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학교 측의 태도다.
이렇게 펼쳐지는 영화 ‘괴물’은 언뜻 교육 현장의 문제를 다룬 사회파 드라마 같다. 한데 이는 영화의 3분의 1 정도까지의 감상일 뿐. 엄마의 관점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이후 다른 인물들로 관점을 바꿔 다시 전개될 때마다 관객이 앞서 본 것과는 좀 다른 면면이 드러난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마다 시각을 달리해 변주하는 방식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고전이 된 영화 ‘라쇼몽’(1950)을 떠올리게 한다. ‘라쇼몽’은 부인과 함께 산길을 가던 사무라이가 도적을 만나 죽임을 당한 뒤,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저마다 재현하듯 보여주는데 그 내용이 제각각이다. 과연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나중에 나오는 목격자의 이야기조차 의심스럽다.
‘괴물’은 이런 점에서 다르다. 서로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끝에 이야기의 진실이라고 할 만한 것을 관객에게 뚜렷이 보여준다. 어른들이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 아이들의 경험, 아이들의 세계가 교육과 양육의 문제는 물론 그 이상의 주제로 울림과 감동을 준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괴물’의 뉘앙스마저 처음과 다르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이야기’가 관객과 맺는 관습을 정교하게 이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허구의 이야기라도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을 일단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닌 법. 실제 세상도 마찬가지다. 같은 이야기가 전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라쇼몽’의 시대에는 단연 새로운 주제였지만, 지금 세상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같은 현실을 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시각이 엇갈리고, 그래서 진실은커녕 소통 불가만 확인하는 경우가 자주 벌어진다. 영화 ‘괴물’은 이런 점에서도 위로를 준다. 뜬소문이 낳은 오해를 비롯해 단편적 사실 너머의 진실을, 그런 진실의 존재를 극 중 인물 모두는 아니라도 적어도 관객은 알게 된다.
‘괴물’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데뷔작을 제외하면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연출해왔다. 이번 영화는 다르다. TV 드라마로도 이름난 작가 사카모토 유지의 시나리오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한국 극장가에서는 두 달 전 개봉해 롱런 중이다. 다음 달 초에는 히로카즈 감독의 내한 및 관객과의 만남도 예정돼 있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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