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임신 중지에 대해 쓰기로 했다
[심혜진 기자]
"뭔가 잘못되었네요. 태아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있어요. 자연유산이 될 확률이 높아요."
초음파 화면을 보던 의사가 말했다. 나는 임신 14주 차 정기검진을 받던 중이었다. 어리둥절한 내게 의사는 머리둘레와 몸길이를 설명하며 중절 수술을 권했다.
"자연유산 될 때까지 기다리면 어떨까요?"
"아마 몇 주 동안은 임신 상태가 이어질 거예요. 그동안 아기집이 커지면서 점점 배꼽 위로 올라올 텐데, 산모에게 너무 위험해요. 하루라도 빨리 손을 쓰셔야 해요. 나중에 더 힘들어져요."
"그럼 이제... 수술 날을 잡으면 되나요?"
"뱃속에서 태아가 죽거나 태아가 사라진 계류유산은 수술할 수 있지만 저희 병원에서 '그 수술'은 안 해요. 다른 곳에 가셔야 해요."
10년 전, 임신중단 수술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자궁 속 태아가 "잘못" 되었다. 위험한 데 '그 수술'은 못 한다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합법적으로 '그 수술'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의사에게 유산 진단을 받거나, 부모에게 유전적 질환이나 정신장애가 있거나, 강간에 의한 임신 등 아주 제한적으로만 허용한다.
내 경우 태아가 '잘못' 되었을 뿐 유산은 아니었고, 유전적 질환도 없었다. 법에 '임신을 유지하는 것이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라는 조항이 있긴 했다. 내 몸 상태는 심한 입덧을 빼면 아무 이상이 없었고, '해할 우려'도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법 조항은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다행히 지인이 그 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쪽지를 내 손에 쥐어주며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종이엔 수술이 가능한 병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어느 뒷골목의 산부인과 침대에 누워 있었다. 100만 원이 넘는 현금다발은 이미 접수대에 올려놓았다. 진료 카드는 작성하지 않았다. 1인 침대가 있는 작은 방 하나를 배정 받았다. 수술을 위해 무언가를 (자궁 입구까지) 밀어 넣은 채 아픈 배를 부여잡고 열 시간 동안 침대를 뒹굴었다.'
임신 중지를 경험한다는 것
수술 후 다섯 달이 지나 쓴 글이다. 병원에서의 일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일단 몸에서 피가 계속 나왔고, 오한과 발한을 오가는 몸 상태 때문에 기운이 나지 않았다. 정신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태아가 사라졌다는 상실감 그 이상의, 몹시 불편한 감정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 병원에 내가 다녀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후유증이 생겨도 병원이나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했고 병원비를 현금으로 준비해야 했던 것 등 내가 겪은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에도 무력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여성과 의사와 간호사가 내가 겪은 일과 같은 일을 경험하고 목격했을 텐데 왜 세상엔 이런 이야기가 없을까. 당연하지. 불법을 저질렀으니까. 답답하고 불쾌했던 이 일은 2019년 4월 '낙태죄 헌법불일치' 판결을 받은 후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 '사건' 아니 에르노 |
ⓒ 민음사 |
작가는 이 책을 35년이 지난 1999년에야 쓸 수 있었는데, 1975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임신 중단 수술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낙태죄 헌법불일치 판결이 난 그해 10월, 그러니까 작가가 책을 쓴 지 20년 만에야 겨우 번역 출간되었으니 책에 대한 두 나라의 사회적 맥락은 같다.
"중절하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못 할 일은 아니었기에, 특별한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범한 시련이리라 짐작했다. 내 앞을 지나간 수많은 여성들이 새겨 놓은 길을 따라가면 될 듯싶었다."(23쪽)
그는 "피임의 자유, 가족계획과 관련한 비합법적인 협회의 일원"인 지인을 찾아가고, 도서관에서 관련 책을 찾아 읽는 등 "길"을 찾는다. 그러나 곧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27쪽)
그는 수술을 경험한 여성을 직접 만나 "자궁 경부에 탐침관을 집어넣고, 유산이 되기만을 기다"(44쪽)리던 중 패혈증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도 똑같은 시술을 받으며 "내내 울었다. 계속 아팠고, 배 속에 묵직한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가 왜 아팠고, 어떻게 아팠고, 얼마나 아팠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바로 내가 겪은 것과 같았다. 다른 점은, 나는 약물을 사용한 덕에 10시간 만에 마취한 상태로 수술할 수 있었고, 그는 닷새 동안이나 탐침관을 넣은 채 생활하다 마지막 날 "고통 속에서 헐떡거리"다가 빠져 나온 태아의 탯줄을 스스로 자르고 "변기 물을 내"려야 했다는 점이었다.
임신 중단을 인간의 권리로
"다른 이들은 결코 가려고 하지 않는 곳까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긍심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감정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쓰게끔 이끌었다."(75쪽)
수술한 일을 되새길 때 떠오르는 감정이 꼭 죄책감이나 죄의식, 슬픔일 필요는 없다는 작가의 해석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 경우 태아를 잃은 슬픔은 몇 개월 후 다른 색깔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파스텔톤의 잔잔하고 가벼운 애틋함이랄까.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슬픔을 간직한 여인'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안쓰러운 눈빛, 말 줄임, 이런 것들이 나를 배려하려는 것임은 알았지만 어쩐지 나는 어색해졌고 부자연스러웠다. 이제 괜찮다며 내 상태를 적극 알리려 애쓰다가 나중엔 이마저 피곤해져 그냥 적당히 사연 있는 여자 표정을 보여주며 넘어갔다.
수술을 하고 회복한 경험을 나도 자세히 쓰고 싶었고, 다른 여성들의 유산 경험을 듣고 인터뷰 글을 써 볼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려줄 대상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글을 쓴다고 해도 어떤 반응이 따라올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건> 역시 "출판되자마자 조롱을 받거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진정한 장소> 72쪽) 아니 에르노가 유명한 작가였음에도, 사회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명작가인 내 글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인터뷰이를 찾더라도 그들의 수고에 보답할 자신이 없어 아직도 보류 상태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로 관련 법이 언제 바뀔지 늘 관심을 두고 지켜본다. 5년이 다 되어가지만, 국회 내에서 표류 중이라는 오래된 게시물만 확인할 뿐이다.
사회가 임신 중단도 권리라는 걸 받아들여 법 조항이 바뀔 때까지, 지금도 어느 병원에선 건강보험을 보장받지 못하고 의료기록도 남길 수 없는 여성들이 현금다발을 병원 카운터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들 각각의 사연이 중요할까? 아니. 권리에는 특별한 사연이 필요치 않다.
책 <진정한 장소>에서 아니 에르노는 말한다. "정말이지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한 것이 왜요? 아니 그것은 여성들의 탓이 아니었어요. 단지 사회의 잘못이었죠. 그 시절에는 여성들에게 해결책을 제공해 주지 않았어요. 사실상 여성들의 자유를 금지한 거죠."
사회를 이렇게 만든 책임을 모든 성인이 N분의 1로 나눠 가져야 하는 건 아닐 거다. 더 큰 책임이 있는 이들이 있고 반대로 보상받아야 할 이들도 있다. 각각 권력자와 소외계층이 그럴 것이다. 나는 잘못된 법과 관행의 피해자이지만, 한편으론 경험한 자의 힘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또 내겐 '글'이 있다. 글을 쓰는 행위로서 내가 지고 있는 책임의 일부를 행하기로 했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함께 읽자고, 이제 임신 중단을 인간의 권리로 받아들이자고, 그리고 현재 국회 상임위원회에 계류중인 낙태죄 조항을 완전히 폐지하는 안을 비롯한 6개의 안을 통과시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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