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몰려오고 포탄 떨어지는데…” 6·25참전 목사의 뜨거운 고백

김동규 2024. 1. 29. 16:5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재근 군목 7기
채규락 군목 6기
두 신앙의 선배에게 6·25전쟁 이야기를 듣다.

다음세대의 탈종교화와 더불어 ‘다음세대 황금어장’으로 꼽혀왔던 군대의 선교환경은 날로 열악해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들던 전쟁터를 누비던 군종목사의 고백을 듣노라면 군대는 선교 최전방 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국민일보가 참전용사 출신의 국내 최고령 군종목사 2인방을 만났다.

200명→8000명 회심 ‘기적’도
김재근 목사가 지난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6·25전쟁 참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구로구의 한 빌라. ‘국가 유공자의 집’ 문패가 걸린 현관문을 열자 김재근(94) 목사가 인사를 건넸다. 그의 왼쪽 가슴에 달린 육군참모총장표창 등 수많은 약장이 지난 세월을 대변했다. 구순을 훌쩍 넘은 된 김 목사는 6·25전쟁과 월남전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기억에서 생생하게 끄집어냈다.

“포탄이 막 날아오는데 혼비백산이었어요. ‘아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죠. 바위가 눈에 띄어 그쪽으로 몸을 피하고 계속 기도했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수십여분 정도 지났을까요. 밖에 나오니 생존한 사람이 많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셨단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라고요.”

김재근 목사가 8사단에서 복무할 당시 사진.

김 목사는 6·25전쟁 한복판에서 전후방 가릴 것 없이 군 최소의 단위 부대인 분대부터 사단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수없이 기도했다. 용기 있게 싸우고 생명을 보호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던 그의 진심이 통했을까. 신앙이 없던 병사들도 그를 찾아와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했다.

1953년 김 목사가 8사단에 배치됐을 때에는 1만1000여명 가운데 8000여명이 기독교 신자로 회심하는 ‘사건’도 있었다. 김 목사는 “당시 사단장에게 ‘지금처럼 혼란스러울 때야말로 군인이 복음으로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며 “그렇게 사단장 승인을 받아 연대 군목과 함께 매일같이 전도 강연을 펼쳤다. 1년 뒤 마지막 브리핑할 때 불과 200명도 안되는 신자는 8000명이 됐다”고 설명했다. 마치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전쟁터에서 경험한 것이다.

1967년 김 목사는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군은 땅굴에서 차량을 향해 클레이모어를 쏘는 전술을 애용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전우가 사상당했다”며 “차량을 이동하면서 길목을 통과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갔는데 무사히 왕래했다”고 전했다.

김재근 목사가 주월한국군사원조단에서 복무할 당시 사진.
출전 직전에 ‘군종목사’ 인사 명령
채규락 목사가 지난 26일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6·25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학교 마지막 2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소집을 받아 닷새간 훈련소 기초훈련을 받고 즉시 전선에 투입됐습니다. 수많은 전사자를 보면서 제 죽을 날을 기다렸죠. 다시 가족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았고 가족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죠.”

지난 26일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만난 채규락(101) 목사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6·25전쟁 당시 상황을 전했다.

채규락(오른쪽) 목사가 설교하고 있는 모습.

1952년 9사단에 배치된 채 목사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백마고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됐다. 어느 날 전선으로부터 귀순한 북한군이 적의 주요정보를 제공했다. 백마고지 일대에 북한군이 총공격 해온다는 첩보였다. 첩보는 사실이었고 이는 백마고지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채 목사가 속해 있던 3개 대대가 백마고지에 진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 장병은 사지로 향하는 심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연대본부로부터 군종 목사 인사명령이 떨어졌으니 제대하라는 특명이 왔다. 채 목사는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임하려고 출동준비에 분주한 전우들과 비애와 감격이 뒤섞인 가슴을 안고 석별의 악수를 하고 떠났다. 그렇게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꺼내 가셨다”고 고백했다.

‘6·25전쟁 참전 1호 군목’이 된 채 목사는 전장을 누비면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는 “옆에 있던 참모나 지휘관이 포로가 되기도 했고 후퇴할 때는 1개 사단이 1개 대대로 줄어들 만큼 절체절명의 상황도 겪었다. 돌이켜보니 순간순간 나를 지키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모두 은혜였다”고 회고했다.

1952년 채규락 목사가 소속한 부대가 단체 촬영하고 있다.
군목, 희망과 소망의 전령사

인터뷰 말미. 합친 나이 195세의 두 원로 군목이 일선의 후배 군목들에게 전하는 조언은 기자의 마음까지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라를 지켰단 사실만으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사명이니깐요. 사람들은 희망과 소망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 희망과 소망은 주님의 복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군목들이 영적·정신적으로 장병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전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김재근 목사)

“우리는 누구나 인생을 복되고 성공적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 한 페이지를 기록할만한 공적이 없어도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세운다면 사도 바울처럼 하늘에서 의의 면류관이 예비돼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군목이 나서서 군 장병의 삶을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세요.”(채규락 목사)

용인=글·사진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