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을 포기한 개발자의 일리 있는 사유
[조건준]
"세상을 바꾸는 건 기술이 아니라 관점이다."
▲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 |
ⓒ 휴머니스트 |
시중에 랜덤채팅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 앱들은 디지털 성착취가 일어나는 온상이나 다름없다. 호프집에서 성추행이나 강간이 벌어진다면, 일부 나쁜 손님만의 탓일까. 플랫폼은 이용자에게 일상의 편리를 돕는 순풍이지만, 해당 산업이나 생태계에는 파괴적으로 몰아치는 폭풍이다. 중소기업만이 아니라 그 아래 계약된 개별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렇다.
기술이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라인이야말로 물리적 요소에 근거하고 있다. 콘센트, 전선, 전봇대로 연결되는 기술은 신비롭지 않다. 그 원천은 결국 지구의 온갖 자원으로부터 나온다.
인공지능 기술로 개발한 챗봇과 대화를 한 번 나눌 때마다 우리는 지구의 물을 약 500ml씩 사용한다. 이런 저자의 관점이 참 좋다. 누구나 편향적이지만, 온라인에 매달려서 코 박고 사는 세상에서 오프라인을 잃지 않는 균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미지는 폭력이다. 사진은 감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놓으며, 그 판단의 근거를 나타내는 일종의 토템 기능을 한다. 말로 된 표어보다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의 정서를 훨씬 더 구체화하는 것이다. '레나 lena'의 사진은 1972년 11월호 게재된 것이다. 50년이 지나도 이미지와 영상처리의 표준 샘플로 사용된다.
저자의 경험처럼 나도 온라인에 글을 남길 때 이미지를 넣기 위해 사진이나 그림을 찾는다. 그러다 선정적 그림을 접하게 된다. 무의식적이든 혹은 상업적 목적이 분명하든 남성인 나도 이런 이미지들의 소비자가 된다.
더 심각한 것은 미성년자를 포함해 검색을 통해 단어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가 형성된다. 맥락을 통해 단어를 배우는 우리의 내면에 무엇이 박힐까. 민주화운동 관련 일러스트는 죄다 남성뿐이었다는 몰랐던 사실에 놀랐다.
오픈AI는 챗GPT의 윤리적 기준을 높이기 위해 케냐 노동자들에게 시간당 2달러 미만의 급여를 지불하는 식으로 데이터 레이블링 작업을 외주화했다고 한다. 저임금으로 노동하는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이야말로 인공지능의 또 다른 스승이다.
'디지털 눈알 붙이기'라는 자조 섞인 노동을 하는 그들은 인류를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제3세계 데이터 레이블러뿐만 아니라 폭력과 소수자성에 민감한 이들이 앞서 상처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안전한 챗봇이 가능해진다.
개발진에게 시선을 돌리면 드러나는 존재들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을 벌여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가 생겼기에 유아를 데리고 이동해야 하는 사람도, 나이가 많아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사람도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웹 접근성도 장애인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는 노동자와 노조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조는 조합원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노조 혐오가 횡횡하는 현실이 슬프다.
2021년 자료에 따르면, 대학 자연·공학계열 입학생 성별 비율은 남성이 69.7%, 여성이 30.3%다.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 연구과제의 경우 책임자의 성별 비율이 남성은 88.1%, 여성은 11.9%였다. 네이버의 주요 리더 가운데 여성은 23명, 남성은 114명으로, 여성은 16%에 그쳤다. 남초 유저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유포하는 손가락 논란이 한창인 지금, 개발자의 기울어진 운동장도 잊지 말자.
저자는 단지 개발자가 아니라 기획, 디자인, 프로젝트운영과 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협업으로 탄생하는 IT서비스의 '개발진 윤리'를 강조한다. IT시스템의 유지보수 노동자들에게 연휴는 대규모 작업을 감행하기 위한 디데이다.
유지보수 노동자들이 연휴를 반납하고 일하는 이유는 중단되지 않고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서비스 속성 때문이다. 컨베이어 시스템이 멈춰 공장을 가동할 수 없으면 그날 생산하지 못한 물품이 곧바로 손실 처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컨베이어가 깔린 공장에 비유한다면, 플랫폼이 깔린 세상은 '소셜팩토리', 즉 사회공장이다.
눈이 펑펑 내리던 주말, 고객사 직원의 요구로 시스템을 살펴보러 출근했던 한 개발자는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개발자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거나, 임신 중에 투입되어 연일 밤샘한 나머지 아이를 유산했다는 비보들을 심심찮게 듣는다. 2020년 발표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프리랜서 개발자 중 과반이 넘는 57.3%가 저녁근무를 한다고 응답했다. 저녁보다 늦은 야간 근무는 32%, 휴일 근무도 32%에 달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편리함이 너무 매끈하다고 생각한다. 저녁에 주문하면 아침 문 앞에 택배가 도착하고,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다. 자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든 편리함은 수동이고 누군가의 노동이다. 아침에 세상이 멀쩡하다면 자는 동안 그만큼의 다른 이의 노동에 빚진 것이다.
커뮤니티는 나의 힘
'네카라구배'라는 입시가 생겼다. 코딩 테스트 외에 사전 과제가 있다. 말이 사전과제이지 실상은 채용을 목적으로 강요되는 무급노동이다. 개발자들은 개발 트렌드가 너무 빨리 바뀌기에 불안과 시간빈곤의 학습 곡선 안에서 부단히 공부한다.
왜 테크 업계는 대량해고를 밥 먹듯 할까. 2022년 미국 테크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10만 명이 넘는다. 서비스의 상당 부분을 개발진의 직접 노동에 의존하고 있는 테크 업계의 특성상, 이들을 성장하려 할 때 사람을 미친 듯이 확보하고 조금이라도 침체되면 우수수 잘라낸다.
커뮤니티는 접점이 없던 사람을 만나고 전혀 다른 주제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 (비)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만들거나 그런 모임에 나가는 것, 온라인으로만 만나더라도 상관없다. 저자가 오래 머물고 있는 커뮤니티 중 하나는 '테크 페미'다.
"엑셀과 싸우는 시간을 줄여 세상과 싸우자" 커뮤니티의 소개 문구 중 하나다. 저자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계발과 성장을 포기했다. 더 뛰어난 기술자가 되기보다 더 날선 관점을 가지길 원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한 성장이 아니라 깊어지는 성숙이 아닐까. 저자는 개발자보다 유지보수 노동자라는 직함을 더 편안하게 여긴다. 모두가 기를 쓰고 새로운 서비스만 출시한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멸망하리라.
이 책을 통해 무수한 방언들이 있는('판교방언'이라는 말처럼) 테크업계를 더 알게 되고, 테크 페미의 시각을 접하게 된다. 올해 내내 프리랜서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직업군과 독특한 세상을 접했다. 세상은 저마다 유니크한 존재들로 구성된다. 오랫동안 제조업 노동현장에 함께 하면서 마주한 전통적 공장과 다른 '사회공장(소셜팩토리)'의 노동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늘 접속에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착취당하는 노동이라는 측면, 보이지 않는 판매전략에 빠지는 상업적 차원, 자각 없는 맥락에 흡수되는 성적 차원에서 도구가 될 뿐 주체로서 온라인 세계에 접속하는 것을 부단히 거부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조건준 아유 대표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2월호 '책 만나기'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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