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2000㎞ 목숨 건 탈북…핸디캠 하나 들고 따라나선 韓감독
탈북 과정 동행 취재한
‘시’ 촬영감독 김현석씨
베트남 정글 25시간 왕복
“신발 끈 못 맬 만큼 다급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죠”
“베트남에선 모든 게 비밀이었어요. 고속도로 갓길에 숨어있던 탈북민 가족을 차에 태워 국경 근방 은신처로 이동했죠. 현지 브로커들한테 끌려 나오듯 내리니 깜깜한 밀림 한가운데였어요. 하루 넘게 산길을 걸었습니다. 카메라에 담느라 풀린 신발 끈 맬 겨를도 없었죠.”
2019년 탈북민 노씨 일가족의 탈북 경로를 동행 취재한 김현석(47) 촬영감독은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고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돌이켰다. 이창동 감독의 칸 국제영화제 수상작 ‘시’(2010), '도희야'(2014), 판빙빙 주연 영화 '녹야'(2023) 등을 촬영했던 그는 탈북민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31일 개봉)로 지난해 미국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다큐는 낙원이라 믿었던 북한에서 탈출하려는 두 가족의 목숨 건 여정을 통해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 박사 등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콩고 여성 인권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다큐 ‘기쁨의 도시’(2018)를 만든 매들린 개빈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다큐 촬영을 위해 사선을 넘나든 김 감독을 지난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났다.
팔순 노모·어린 자녀까지 목숨 건 1만2000㎞
23년 간 1000명 이상의 탈북자를 도운 김성은 목사에게 도움을 청한 두 가족이 다큐의 중심이다. 두 번째 탈북 시도로 남한에 정착한 북한군 출신 이소연 씨는 브로커를 통해 북에 두고 온 아들을 탈출시키려 한다. 탈북한 가족 때문에 외지로 추방 당할 위기에 처한 노영길‧우영복 씨 부부는 80대 노모, 어린 두 딸까지 둘러 업고 온 가족이 탈북 길에 오른다.
두만강 국경을 넘어 중국‧베트남‧라오스‧태국 정글을 헤치고 한국에 이르는 1만2000㎞ 탈출 경로가 북한 주민, 제작진이 직접 찍은 영상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다. 베트남‧라오스 촬영을 제작진이 동행했다.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백인 감독 대신 김 감독이 최대원 공동 프로듀서, 김 목사와 함께 현지에 파견됐다.
배가 뒤집혀 집단 사망한 탈북민 사례도 있었고, 경찰에 붙잡히거나 험한 정글에서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던 만큼, 다큐엔 인기척이 조금만 느껴져도 노심초사하는 탈북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로버트 드 니로, 탈북 다큐 시동 걸었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다큐에도 출연한 탈북민 이현서 씨의 회고록 『일곱 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에서 출발했다. 2016년 책에 감명 받은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이씨의 미국 사인회에 찾아와 “뭘 해줄 수 있을지” 물었고, 이씨가 탈북민 스토리의 할리우드 영화화라 답한 걸 계기로 다큐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2019년 합류한 김 감독이 3년 간 촬영한 노씨 일가의 탈북 과정, 또 다른 주인공 이소연 씨가 탈북 브로커에게 3000만원의 거금을 건네고도 아들의 생사조차 모르게 된 사연이 최종 완성본의 뼈대를 이루게 됐다.
“영화 ‘시’ 제작사를 통해 ‘비욘드 유토피아’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김 감독은 “‘시’에서처럼 핸드헬드 촬영으로 긴장감을 주며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방식이 이 다큐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촬영 전공 시절 탈북 소년 주인공의 단편 ‘불을 지펴라’(2007)에 참여하는 등 탈북 소재가 낯설지 않았다”고 말했다. “탈북 경로까지 동행할 줄 몰랐지만, 위험한 현장이라 촬영감독으로서 오히려 더 끌렸다”면서다.
-탈북 경로는 어디서부터 동행했나.
“노씨 가족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넘어온 이후부터다. 중국 부분은 그들이 직접 핸드폰으로 찍었다.”
Q : -카메라 장비는 어떻게 준비했나.
“크기가 작고 4K 화질에 적외선 촬영기능을 갖춘 소니 핸디캠 1대로 최소화했다. 영상 품질보단 필요한 장면을 확보하자는 데 미국 팀도 동의했다. 최 프로듀서가 녹음‧사운드를 맡았다. 복장‧생존 장비도 없이 모두가 무방비 상태였다. 김 목사님은 와이셔츠 차림에 구두 신고 갔다가 발 부상으로 정글에 낙오되기도 했다.”
Q : -위험했던 순간은.
“베트남 브로커가 말이 가이드지, 거의 산사람이다. 쌀 포대를 짊어지고 빠른 속도로 앞서 가는데, 길도 없는 산에서 따라잡기 쉽지 않더라. 12시간 걸려 노씨 가족을 라오스 국경에 데려다 준 뒤, 우리는 정식 출입국 절차를 밟기 위해 13시간을 더 걸어 베트남 출발지로 돌아와야 했다.”
라오스에서 노씨 가족과 재회했을 땐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워했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정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촬영팀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김 감독 역시 “탈북 경로 내내 브로커들한테 목숨이 볼모로 잡힌 거나 다름없는 상태를 경험”하며 이들의 심정에 공감했다. “80대 할머니, 어린아이까지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강인한 생존 의지가 느껴졌다”면서다.
그는 “아들을 못 데려온 이소연 씨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경으로 다큐에 계속 출연하기로 했을 땐 그 안타까운 마음이 헤아려져 힘들었다. 촬영 분량 확보를 고민했던 게 미안해졌다”고 덧붙였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지난해 11월 미국 개봉 후 미 국무부가 특별 상영회를 열고, 지난 9일 공영방송 PBS가 미국 전역에 방영하는 등 북한 인권 현실을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먹은 건 없는데 인분을 비료로 바쳐야 하는 탓에 남의 똥을 훔치고, 굶어 죽은 시신이 강에 떠다니는 참상이 다큐에서 그려진다.
지난 19일 서울 용산의 한 극장에서 열린 ‘비욘드 유토피아’ 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 이소연 씨는 “한국에 정착해 자유와 행복이란 걸 알았다. 24시간 따뜻한 물과 전기가 나오고 배 고프지 않은 것"이라며 "아들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 북한 정부가 (아들을) 죽이진 못할 것 같다는 희망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함께 자리한 김 목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탈북민들의 고통은 가중됐다. 중국 국경이 봉쇄되고 탈북민을 돕는 건 인신매매로 규정돼 처벌도 강화됐다. 과거 브로커 수수료가 1인당 300만원대였다면 지금은 2000만~3000만원으로 10배 뛰었다”면서 “탈북민과 그들의 보편적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숨은 아픔을 공감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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