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2000㎞ 목숨 건 탈북…핸디캠 하나 들고 따라나선 韓감독

나원정 2024. 1. 2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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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비욘드 유토피아’
탈북 과정 동행 취재한
‘시’ 촬영감독 김현석씨
베트남 정글 25시간 왕복
“신발 끈 못 맬 만큼 다급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죠”
다큐 '비욘드 유토피아'에서 생생한 탈북 경로를 세상에 열어보인 김현석 촬영감독을 25일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베트남에선 모든 게 비밀이었어요. 고속도로 갓길에 숨어있던 탈북민 가족을 차에 태워 국경 근방 은신처로 이동했죠. 현지 브로커들한테 끌려 나오듯 내리니 깜깜한 밀림 한가운데였어요. 하루 넘게 산길을 걸었습니다. 카메라에 담느라 풀린 신발 끈 맬 겨를도 없었죠.”

2019년 탈북민 노씨 일가족의 탈북 경로를 동행 취재한 김현석(47) 촬영감독은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고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돌이켰다. 이창동 감독의 칸 국제영화제 수상작 ‘시’(2010), '도희야'(2014), 판빙빙 주연 영화 '녹야'(2023) 등을 촬영했던 그는 탈북민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31일 개봉)로 지난해 미국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다큐는 낙원이라 믿었던 북한에서 탈출하려는 두 가족의 목숨 건 여정을 통해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 박사 등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콩고 여성 인권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다큐 ‘기쁨의 도시’(2018)를 만든 매들린 개빈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다큐 촬영을 위해 사선을 넘나든 김 감독을 지난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났다.


팔순 노모·어린 자녀까지 목숨 건 1만2000㎞



23년 간 1000명 이상의 탈북자를 도운 김성은 목사에게 도움을 청한 두 가족이 다큐의 중심이다. 두 번째 탈북 시도로 남한에 정착한 북한군 출신 이소연 씨는 브로커를 통해 북에 두고 온 아들을 탈출시키려 한다. 탈북한 가족 때문에 외지로 추방 당할 위기에 처한 노영길‧우영복 씨 부부는 80대 노모, 어린 두 딸까지 둘러 업고 온 가족이 탈북 길에 오른다.
두만강 국경을 넘어 중국‧베트남‧라오스‧태국 정글을 헤치고 한국에 이르는 1만2000㎞ 탈출 경로가 북한 주민, 제작진이 직접 찍은 영상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다. 베트남‧라오스 촬영을 제작진이 동행했다.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백인 감독 대신 김 감독이 최대원 공동 프로듀서, 김 목사와 함께 현지에 파견됐다.
배가 뒤집혀 집단 사망한 탈북민 사례도 있었고, 경찰에 붙잡히거나 험한 정글에서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던 만큼, 다큐엔 인기척이 조금만 느껴져도 노심초사하는 탈북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로버트 드 니로, 탈북 다큐 시동 걸었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다큐에도 출연한 탈북민 이현서 씨의 회고록 『일곱 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에서 출발했다. 2016년 책에 감명 받은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이씨의 미국 사인회에 찾아와 “뭘 해줄 수 있을지” 물었고, 이씨가 탈북민 스토리의 할리우드 영화화라 답한 걸 계기로 다큐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2019년 합류한 김 감독이 3년 간 촬영한 노씨 일가의 탈북 과정, 또 다른 주인공 이소연 씨가 탈북 브로커에게 3000만원의 거금을 건네고도 아들의 생사조차 모르게 된 사연이 최종 완성본의 뼈대를 이루게 됐다.
20여년전 탈북한 이현서씨(오른쪽)와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기념 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중앙포토]

“영화 ‘시’ 제작사를 통해 ‘비욘드 유토피아’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김 감독은 “‘시’에서처럼 핸드헬드 촬영으로 긴장감을 주며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방식이 이 다큐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촬영 전공 시절 탈북 소년 주인공의 단편 ‘불을 지펴라’(2007)에 참여하는 등 탈북 소재가 낯설지 않았다”고 말했다. “탈북 경로까지 동행할 줄 몰랐지만, 위험한 현장이라 촬영감독으로서 오히려 더 끌렸다”면서다.

-탈북 경로는 어디서부터 동행했나.
“노씨 가족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넘어온 이후부터다. 중국 부분은 그들이 직접 핸드폰으로 찍었다.”

Q : -카메라 장비는 어떻게 준비했나.
“크기가 작고 4K 화질에 적외선 촬영기능을 갖춘 소니 핸디캠 1대로 최소화했다. 영상 품질보단 필요한 장면을 확보하자는 데 미국 팀도 동의했다. 최 프로듀서가 녹음‧사운드를 맡았다. 복장‧생존 장비도 없이 모두가 무방비 상태였다. 김 목사님은 와이셔츠 차림에 구두 신고 갔다가 발 부상으로 정글에 낙오되기도 했다.”

Q : -위험했던 순간은.
“베트남 브로커가 말이 가이드지, 거의 산사람이다. 쌀 포대를 짊어지고 빠른 속도로 앞서 가는데, 길도 없는 산에서 따라잡기 쉽지 않더라. 12시간 걸려 노씨 가족을 라오스 국경에 데려다 준 뒤, 우리는 정식 출입국 절차를 밟기 위해 13시간을 더 걸어 베트남 출발지로 돌아와야 했다.”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31일 개봉)은 살기 위해 탈북하려는 사람들의 생생한 탈출 과정과 함께 북한 인권 유린의 참상을 세밀하게 증언한다. 올초 미국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비롯해 23일 현재까지 전세계 영화제 7개 수상, 40개 후보에 올랐다. 사진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홈초이스


라오스에서 노씨 가족과 재회했을 땐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워했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정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촬영팀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김 감독 역시 “탈북 경로 내내 브로커들한테 목숨이 볼모로 잡힌 거나 다름없는 상태를 경험”하며 이들의 심정에 공감했다. “80대 할머니, 어린아이까지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강인한 생존 의지가 느껴졌다”면서다.
그는 “아들을 못 데려온 이소연 씨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경으로 다큐에 계속 출연하기로 했을 땐 그 안타까운 마음이 헤아려져 힘들었다. 촬영 분량 확보를 고민했던 게 미안해졌다”고 덧붙였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지난해 11월 미국 개봉 후 미 국무부가 특별 상영회를 열고, 지난 9일 공영방송 PBS가 미국 전역에 방영하는 등 북한 인권 현실을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먹은 건 없는데 인분을 비료로 바쳐야 하는 탓에 남의 똥을 훔치고, 굶어 죽은 시신이 강에 떠다니는 참상이 다큐에서 그려진다.
지난 19일 서울 용산의 한 극장에서 열린 ‘비욘드 유토피아’ 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 이소연 씨는 “한국에 정착해 자유와 행복이란 걸 알았다. 24시간 따뜻한 물과 전기가 나오고 배 고프지 않은 것"이라며 "아들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 북한 정부가 (아들을) 죽이진 못할 것 같다는 희망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함께 자리한 김 목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탈북민들의 고통은 가중됐다. 중국 국경이 봉쇄되고 탈북민을 돕는 건 인신매매로 규정돼 처벌도 강화됐다. 과거 브로커 수수료가 1인당 300만원대였다면 지금은 2000만~3000만원으로 10배 뛰었다”면서 “탈북민과 그들의 보편적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숨은 아픔을 공감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31일 개봉)에서 아들을 한국에 데려오는 데 실패한 탈북민 이소연씨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북한 실태를 알리고자 다큐에 출연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사진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홈초이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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