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논란, 호평받던 '고려거란전쟁'에 찾아온 위기
[이준목 기자]
'역사왜곡논란'에 휩싸이며 흔들렸던 <고려거란전쟁>이 다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왔다. 1월 28일 방송된 KBS2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22회에서는 호족세력과의 갈등을 봉합한 현종(김동준)과 고려 조정에서 다시 거란의 재침공을 막기 위하여 양국간의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거란은 사신을 보내 2차 여요전쟁 당시 현종의 친조(제후국의 왕이 상국의 조정으로 알현을 오는 것) 약속을 지키라고 고려를 압박한다. 아직 전후복구와 전쟁준비가 덜 된 고려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원성왕후의 아버지, 조승연)를 사신으로 거란에 보낸다.
야율융서(요 성종, 김혁)는 고려의 친조가 전쟁을 지연하기 위한 외교적 기만술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김은부를 처형하려 한다. 때마침 거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와 있던 송과 당항(서하) 사신들의 구명으로 김은부는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또한 김은부는 사신들을 통하여 거란이 내부 반란 조짐으로 인하여 당장 고려와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정보도 얻게 된다.
김은부가 거란에 머무르는 동안, 거란도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다. 거란 사신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조건으로 친조 대신 '강동 6주의 반환'이라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한다. 현종과 고려 조정은 거란의 의중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여 혼란에 빠진다. 강감찬(최수종)은 "거란이 정말 전쟁준비를 마쳤다면 협상을 제안할 이유가 없다"며 거란에 무언가 다른 사정이 있음을 직감한다.
재상들은 영토를 결코 떼어줄 수 없다는 쪽과. 그렇게 해서라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분열된다. 여기에 군부를 대표하는 상장군 김훈(류성현)과 최질(주석태)은 호족인 박진(이재용)의 부추김으로 인하여, 현종과 재상들을 찾아와 나라의 명운을 건 협상에 문신들만 참여하고 무신들이 배제되는 상황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며 갈등이 고조된다.
또한 거란이 흥화진을 요구했다는 소식은 저자의 백성들에게도 퍼진다. 백성들의 여론 역시 극명하게 엇갈리며 싸움이 일어날 만큼 분위기가 흉흉해진다. 전쟁이 단순히 군대간의 무력 충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외교를 통한 심리전과 여론전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출이다.
현종은 병부상서 유방(정호빈)과의 독대를 통하여, 거란과 지금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겠지만 백성들의 피해는 적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를 듣고 깊은 고뇌에 빠진다. 유방은 정예병을 육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3년 뒤에 싸운다면 희생은 훨씬 덜할 것이다. 맡겨주신다면 3년 뒤에 흥화진을 되찾을 수 있다" 며 일단은 거란의 요구를 수용하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한편 김은부는 거란에 먼저 사신으로 갔다가 인질로 잡혀있던 하공진(이도국)을 통하여 거란이 원하는 협상의 진짜 의도가 당장 전쟁이 아니라, 강동 6주를 얻어 훗날의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김은부는 하공진의 도움을 받아 고려로 돌아가기 위하여 탈출을 시도하지만 거란군에 붙잡힌다. 소배압(김준배)은 김은부을 구금하며 "고려가 흥화진을 내주면 살아서 돌아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란 땅에서 숨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통보한다.
고민을 거듭하던 현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현종은 강동 6주를 거란에 내준다는 문서에 옥새를 찍는 것을 거부하며, 거란의 사신에게 "흥화진을 내어달라는 말은 곧 고려를 내어달라는 말과 같다. 거란 황제가 흥화진을 갖고 싶다면 먼저 고려를 굴복시키라"며 단호하게 항전을 선언한다.
<고려거란전쟁>은 지난해 첫 방송 이후 시청자들에게 모처럼 '완성도 높은 정통 사극의 귀환'을 알리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거란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명장 양규(지승현)의 활약상을 조명한 16회에서는 뛰어난 영상미와 비장미 넘치는 연출로 호평의 절정을 찍었다. 지난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서는 강감찬 역을 연기한 최수종이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여요전쟁 파트가 막을 내리면서, 전간기를 다룬 17회 이후로 갑자기 달라진 극의 내용과 고증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원작 소설을 집필한 길승수 작가 측에서 <고려거란전쟁> 제작진이 역사적 사료와 원작의 방향성을 무시하면서 극의 완성도가 무너졌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여론은 원작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드라마 제작을 주도하고 있는 전우성 PD와 이정우 대본작가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KBS 시청자 청원 게시판에는 제작진의 해명과 드라마 완성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청자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지난 26일에는 KBS 여의도본사 앞에서 일부 팬들의 트럭시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사극에서 '역사적 고증'과 '상상력을 통한 재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항상 존재해왔다. 하지만 <고려거란전쟁>은 엄연히 실존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정통 사극을 표방했고, 시청자들이 극중 이야기와 캐릭터에 더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문제는 여요전쟁에서 갑자기 고려 내부의 정치적 갈등으로 선회한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변화가, 서사의 개연성이나 캐릭터의 일관성에서 모두 공감대를 전혀 못했다는데 있다.
고려 전기의 부족한 사료로 인하여 2차 여요전쟁에서 3차 전쟁으로 이어지기 전까지 고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은 몇몇 중요한 사건을 제외하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서 제작진은 원작의 범위에서 벗어난 부분에 대하여 현종과 호족들의 대립, 원정왕후(이시아)의 원성왕후(하승리)에 대한 견제 등, 개혁을 둘러싼 고려 내부의 대립에 초점에 맞췄다. 그러나 이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 못한 데다 아예 있지도 않은 사건을 통하여 현종, 강감찬, 원정왕후 등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왜곡하거나 비하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만 높아졌다.
대표적으로 현종은 극중에서는 성장형 군주로 그려지며 실제 역사에서도 고려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17회 이후의 현종은 아무 대책도 없이 개혁을 한답시고 호족과의 전쟁을 선포하는가하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거칠게 몰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는 등의 묘사로 철없는 암군 같아보인다는 혹평을 받았다.
극중 현종보다 더한 최대의 피해자는 역시 원정왕후다. 실제 역사나 원작 소설에서 원정왕후는 현종과 각별한 관계였고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강했던 반면, 드라마에서는 호족의 이익을 대변하여 현종과 대립하는 데다 특권의식에 찌들어 원성왕후나 현종의 충신들을 괴롭히는 '악녀'에 가깝게 변질되어 버렸다.
드라마 속 고려 호족들의 위세나 왕권과의 대립도 과장되었다는 평가다. 고려가 호족들의 위세가 강했고 중앙집권체계가 부족했다는 것이나, 2차 여요전쟁 당시 현종이 수도를 떠나 몽진하던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었다는 것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는 국가가 멸망위기까지 갔던 특수한 전시 상황이었다. 평시 상황에서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몰아내거나, 심지어 황제에게 직접 칼까지 들이미는 행동은, 아무리 위세가 높은 호족이라도 당장 멸문 당할 만한 명백한 반역이다.
굳이 역사나 원작과도 부합하지 않는 이런 설정들을 왜 넣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무리한 사건들만 벌여놓고 졸속으로 해결하는 과정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현종의 최측근인 김은부가 원정왕후와 호족들의 음모로 벼랑 끝에 몰리게 되자, 강감찬은 그 해결책으로 현종을 김은부의 딸인 원성왕후와 결혼하게 하여 '황제의 장인이 되면 죄가 있어도 사해줄 수 있다'는 황당한 정치적 꼼수를 내놓는 것으로 사태를 모면한다. 이는 실제 역사에도 없는 설정으로 현종-강감찬-김은부 세 사람을 한꺼번에 깎아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황제인 현종이 호족들의 비밀결사 모임을 알아내어 소수의 호위병만 이끌고 나타나서 적재적시에 강감찬을 구해낸다는 설정도 억지스럽다. 이 장면에서 그동안 호족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속수무책으로 쩔쩔매던 현종은, 갑자기 환골탈태하여 카리스마 넘치는 몇마디의 언변만으로 호족들을 제압하고 굴복을 이끌어낸다.
사실상 17~20회까지의 이야기는 극의 메인 에피소드인 여요전쟁과는 별다른 연결고리도 없고 아예 줄거리에서 완전히 들어내도 전체적인 스토리 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번외편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청자들에게는 '고려궐안전쟁' '고려구마사'등의 악평을 들으며 드라마의 평판만 급격히 추락시킨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KBS는 사태가 악화되자 지난 27일에 '제작진의 현재의 상황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으며, 설 연휴를 맞아 1주 휴방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겠다'며 결방을 발표했다. 다행히 지난주 방영된 21회~22회에서는 거란과의 외교전을 통하여 3차여요전쟁 파트에 돌입하며 이야기도 어쨌든 본 궤도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동안 붕괴된 캐릭터들의 개연성이나, 제작진에 대한 시청자들의 신뢰도 하락은 후반부 클라이맥스만을 남겨둔 <고려거란전쟁>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남을수 있다. 시청자들은 실제 역사적 고증에 걸맞는 방향성 수정이나 제작진-작가 교체 등 납득할 만한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든 탑을 쌓아올리는 것은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 될수 있다. 모처럼 정통사극 부활에 대한 시청자들의 수요를 확인한 상황에서 <고려거란전쟁>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고퀄리티의 사극 제작이 계속될 수 있을지 가늠할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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