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뮤직비디오의 선한 의도를 믿는다, 하지만 [신필규의 아직도 적응 중]
[신필규 기자]
"힘내세요!"
언젠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들었던 반응이다. 초면인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했으니 적잖이 당황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힘내세요'라니 이건 무슨 뜻일까. 물론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도 그걸 몰랐을 리는 없다.
당신이 어렵게 살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내가 응원하겠다는 의미였을까. 어쩌면 낯선 이를 향해 선의를 보이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성소수자라 살면서 힘든 순간이 많은 건 맞는데 나는 그게 전부일까. 아니면 동성애자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우리가 겪는 고통일까. 그래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되는.
한편으로 차별과 혐오라는 고난과 역경을 마주한 이들은 쉽게 낭만화 되기도 한다. 소수자들은 계속해서 무언가에 부딪히고 상처받고 이를 넘기 위해서는 무언가 행동하거나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동기가 사익 추구가 아니라 주로 존재를 인정받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 소수자들의 투쟁은 종종 숭고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국적·인종·장애 유무·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막론하고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자주 만들어져 왔기에 특별할 것은 없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소수자를 가로막는 차별과 배제를 드러내야만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다는 나름의 장점도 있다.
하지만 상처받기 쉬운 취약성이 소수자들의 주된 특징으로 묘사될 때는 미묘한 감정이 든다. 장르와 매체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집요하게 그리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고통받는 소수자'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 재현과 묘사를 볼 때면 의문이 든다. 나는 그게 전부일까.
▲ 아이유의 신곡 '러브 윈스 올'(Love Wins all). |
ⓒ 이담엔터테인먼트 |
이러한 의뭉스러운 감정을 다시 느낀 건 얼마 전 발표된 아이유의 '러브 윈스 올'(Love Wins all) 뮤직비디오를 본 이후였다. 이 영상에서 아이유와 그룹 BTS의 멤버인 뷔는 종말을 맞은 것과 다름없이 파괴된 세상에서 정체불명의 정육면체에게 쫓기는 역할을 맡았다. 뮤직비디오에서 아이유는 수어를 사용하고 오드아이인 뷔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묘사된다.
영상 중간 초라한 행색으로 도피를 이어가던 두 주인공은 우연히 캠코더 너머로 세상이 온기와 생기를 품고 있는 낙원 같은 모습을 본다. 그리고 캠코더 속 세상에서 아이유는 수어로 말하는 대신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뷔는 오드아이가 사라진 모습을 보인다. 두 사람은 깔끔하고 아름다운 행색으로 각각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있다.
뮤직비디오 공개 이후 언론을 통해 공개된 감독의 해석 가이드에 따르면 '캠코더가 찍히는 화면의 설정값은 폐허가 되기 전 멀쩡했던 세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해석에 따라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면 솔직히 오싹한 느낌이 든다.
폐허가 되기 전 멀쩡했던 세상에선 사람들에게 장애가 없다는 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또한 '말하지 못하는 이와 왼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이'가 주인공인 이유가 '두 사람이 세상의 난관들을 헤쳐가기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 맞다. 하지만 그 이유를 이 사회가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공간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라고 해버리는 건 비슷하게 들릴지라도 결국은 아주 다른 이야기이지 않나.
소수자가 겪는 고통의 사회적 맥락 말하는 게 필요한 이유
어렸을 때 언젠가 엄마는 내게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렇게는 안 살았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엄마는 애가 뭘 알겠냐는 생각으로 이야기했을지 모르지만 나도 놀랐던 건 내가 그걸 단박에 이해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비슷한 생각을 나도 이미 해보았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성적 지향을 숨기고 살아가야 함을 깨닫고 그 누구에게도 내가 가진 감정을 말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종종 상상하곤 했다. 내가 여자였거나 혹은 여자를 좋아했다면 상황은 정말 많이 달라졌을 텐데. 솔직히 말하면 10대 시절까지도 그 생각을 꽤 자주 했다.
하지만 그게 곧 내가 동성애자인 게 싫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고통과 아픔의 원인이 내 성적 지향이라는 뜻도 아니다. 그게 아니라 세상이 동성애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기에 살아가는 게 막막했을 뿐이다. 일견 비슷해 보이는 두 표현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장애인이건 비(非)백인이건 성소수자이건 간에 이들이 겪는 고통이 고난과 역경 때문이며 그것이 실은 매우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것이라는 맥락이 빠질 경우 이야기는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사실 캠코더 너머의 세상에서 아이유와 뷔가 말을 하고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감독의 해설대로 그것이 '상상만 해오던 행복'의 모습이라고 해도 말이다.
왜 그 모습이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상상하게 되었는지 이유와 맥락을 설정하면 된다. 하다못해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하고 한쪽 눈으로 보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라도 가능해진다(물론 이마저도 충분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와 맥락이 아예 없다면 결론은 매우 단순하게 '말할 수 있고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그러지 못한 것보다 낫기 때문'이 되어버린다. 그 상태가 '낙원'에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결론. 하지만 말이 그렇게 되면 현실에 존재하는 장애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건가.
▲ '러브 윈스 올'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
ⓒ 아이유 이지금 |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와 왼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이'들을 극도로 추상적인 디스토피아에 떨어트리고 구체적인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추상적인 정육면체로 표현된 혐오에 마주 시키는 순간 결과물은 애초의 의도와 아예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된다.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인종 차별,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구조,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존재만 전재하고 만들어진 법과 제도. 그리고 이런 것들이 아주 치밀하게 스며든 일상의 문화. 나는 소수자를 재현하기 위해선 이런 것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전면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수자로서 나에겐 정체성과 고통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고통에는 이유가 있고 세상과 연결된 지점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을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만 캠코더 너머의 세상은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혹은 애초에 그 세상의 모습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혐오에 맞서 이겨보려는 그 선의를 예술로 구현할 거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빚내서 집사라' 대책 남발...집값 떨어지면 누가 책임지나"
- 도로 막고 불 지르는 격렬 시위... 89%가 지지하는 이유
- '한반도 전쟁설' 커지자 정부가 돌연 잠잠해졌다
- "윤석열 정권 심판 여론, 폭풍처럼 강해... 이낙연 신당은 걸림돌"
- 집을 산 친구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
- 30대 청년이 두 달간 황무지 1300km 걸었던 이유
- 치료사에게 욕하는 환자를 대하는 법
- 한동훈, 민주당 '이재명 피습' 대응에 "배현진한테 교훈 얻으라"
- 막말하는 극우 유튜버에 '축하 영상' 보낸 국민의힘 인사들
- "한국, 젊은 남녀 갈라설 때 어떤 일 벌어질지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