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 및 재할인율 정책 [국제경제읽기 한상춘]
요즘 들어 경제의 혈액인 돈이 제대로 돌이 않는다는 표현이 자주 눈에 띈다. 한 나라 경제에 있어서 돈이 돌지 않으면 사람의 몸처럼 손발부터 썩어 들어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갈수록 우리 경제내에서 서민층과 자영업자,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다 못해 쓰러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론적으로 어느 특정국가에서 돈이 얼마나 잘 도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가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다. 통화유통속도란 일정기간 동안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이를테면 같은 1만원권이라도 1년에 한번 사용되는 것과 열번 사용되는 것과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잘 유통되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의 경우 한국은행이 발표한 통화유통속도를 보면 추세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 1> 한국 금융상황지수 추이
돈 흐름이 얼마나 정체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하나의 지표가 통화승수다.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고성능화폐, high-powered money)로 나눈 수치다.
한 나라의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현금보유성향과 예금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 그리고 본원통화의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 본원통화가 일정할 때 현금보유성향과 지급준비율이 작을수록 통화승수는 커진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우리나라의 통화 승수를 보면 이 통계가 발표한 이해 최저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중 본원통화와 지급준비율이 변경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그만큼 우리 국민의 현금보유성향이 늘어나 시중에서 돈이 퇴장(hoarding)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최근처럼 통화유통속도와 통화 승수가 떨어지면 동시에 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공급하더라도 민간부문의 반응이 시원치 않아 통화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각종 중앙은행 총재 모임에서 통화정책의 어려움이 호소되고 경기 조절책으로 재정정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큰 정부론(big government)’이 힘을 얻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내금융시장에서는 돈이 제대로 돌지 않음에 따라 종전의 배웠던 경제이론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상 현상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물가를 감안한 실질금리가 이미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들의 수신액은 사상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는 점이다.
각 부문에 있어서도 디플레이션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주가와 부동산값이 떨어져 자산 디플레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경제주체들은 현금흐름(cash flow)이 크게 악화돼 기존의 자산가치 감소를 감수하면서 까지 보험을 해약하는 사례가 급증하는 추세다.
요즘 들어 우리 경제 내에서 위기론과 일본처럼 장기침체를 우려하는 시각이 부쩍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모습만 본다면 일본 경제가 장기복합불황에 빠질 초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현상과 유사하다.
정책적으로도 정책당국이 경제 현안을 풀기 위해 어떤 신호를 주더라도 정책 수용층인 국민과 기업들이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좀비 경제(zombie economy)' 국면에 놓여있는 것도 일본과 비슷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익은 정책들이 쏟아져 정책당국은 정책 혼수와 정책 악순환에 빠지고 정책 수용층인 국민들은 정책에 대한 무감각증이 나타난다.
결국 우리 경제 내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중에 돈을 돌게 해야 한다. 여러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지금의 돈맥 경색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대통령을 포함한 정책당국과 정책수용층간의 신뢰부족(혹은 신뢰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가능한 빠른 시일안에 신뢰를 회복하는 방안이 가장 효과적이다.
최근 논란이 심해지고 있는 위기론과 관련해서도 최소한 국민들의 경제생활을 안정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과 경제각료들이 ‘위기가 아니다’라고 고집하는 심정은 십분 이해되지만 오히려 위기에 가깝게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국민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현 시점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돈을 제대로 돌게 하는 방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돈이 돌리기 위한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보지 못할 때는 재할인율 정책과 같은 전통적인 방안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재할인율 정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화정책의 파급경로(transmission mechanism of monetary policy)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일반적으로 통화정책의 체계는 최종목표와 중간목표 그리고 정책수단으로 구성된다.
통화정책의 최종목표(goals)는 통화당국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국민경제상의 목표를 말한다. 물가안정, 완전고용, 국제수지 균형, 경제성장, 공정분배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통화정책의 중간 혹은 운용목표(operation targets)는 최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화당국이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표다. 대부분 중앙은행들은 양적인 지표로 통화량을, 질적인 지표로 이자율을 중간목표로 삼고 있다.
통화정책 수단(instruments)은 중간목표인 통화량과 이자율을 조절하기 위해 통화당국이 직접 사용하는 정책도구다.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재할인율 정책·지불준비율 정책·공개시장 조작과 같이 국민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 수단과 대출한도제·이자율 규제정책처럼 정책효과가 특정부문에만 한정되는 선별적 수단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재할인율 정책은 중앙은행이 예금은행을 상대로 재할인율을 변경시켜 통화량과 경기를 조절하는 통화정책 수단이다. 이때 재할인율이란 예금은행이 할인한 고객들의 약속어음을 중앙은행에 다시 제시해 대출을 받을 때 적용되는 이자율을 의미한다.
간단한 예를 통해 알아보자. 어느 시중은행이 고객으로부터 할인한 100억원의 약속어음을 한국은행에 제시하고 재할인을 받는다고 할 경우 이때 적용된 재할인율이 20%라면 이 시중은행이 한국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을 수 있는 자금은 80억원이 된다.
만약 한국은행이 재할인율을 10%로 내린다면 같은 약속어음으로 시중은행이 대출받을 수 있는 자금은 90억원으로 늘어난다. 이처럼 한국은행이 재할인율을 인하하면 시중은행들의 대출은 늘어난다. 이는 본원통화 공급이 늘어나면서 돈맥 경화 현상이 풀리고 시중 통화량은 늘어나 경기가 살아난다.
재할인율 정책은 시중 통화량과 경기조절 효과가 확실해 과거 우리나라와 최근 중국처럼 만성적인 자금초과 수요국가에서 주로 사용한다. 이에 반해 채권시장이 발달하고 금리체계(interest system)가 잘 작동되는 선진국에서는 시중 통화량과 경기를 조절하는 수단으로 공개시장 조작에 의존한다. 포트폴리오상 한국의 지위는 신흥국으로 분류된다.
<그림 2> 한국 경제 성장경로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Copyright © 한국경제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