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용산에 갇힌 대통령
지지율 급락에도 대화로 돌파
민감 질문 피하는 민생토론회
국민 설득하는 진심 안 보여
외신도 보도하는 '명품백 논란'
먼저 사과, 그 늪에서 나와야
“어떤 질문도 금지된 것은 없다. 우리가 의견을 교환하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줄 때다.” 2019년 1월 13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대국민 서한을 통해 ‘국가대토론’을 제안했다. 두 달 전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며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가 인상안 철회 발표에도 전국적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고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자 대국민 직접 대화로 돌파하려 한 것이다. 두 달간의 지역별 토론을 거쳐 엘리제궁에서 열린 끝장토론은 새벽 2시반까지 8시간10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마크롱은 2017년 취임 직후 주요 노동단체 대표 8명을 초청해 일대일 면담을 하며 노동개혁 방향을 설명했다. 몇 달 뒤 행정명령을 통해 노동개혁안을 발효시켰다. 하지만 과거 복지개혁안을 행정명령으로 밀어붙이려던 자크 시라크 정부가 격렬한 반대시위에 스스로 물러섰던 것처럼 행정명령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반대시위가 계속되는 중에도 총리 장관 등 정부 측은 100여 차례 노동단체와 만났고 결국 의회 추인이라는 고개를 넘었다. 다음 해 마크롱은 국가철도 개혁을 들고 나왔다. 수십조원의 누적부채에도 역대 대통령의 개혁 시도가 강력한 철도 노조의 반대에 막혀 번번이 무산됐던 과제였다. 그 수십년 묵은 개혁도 야당의 협력 속에 상하원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총파업으로 고속철도(TGV)가 멈추고 전국이 마비되는 상황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더 높은 벽, 연금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재선된 마크롱은 바로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반대여론이 높고 고령자가 많은 도시를 직접 찾아가 시민 수백명과 짧게는 200분, 길게는 6시간까지 토론을 벌였다. 지지율이 급락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2023년 헌법 49조 3항의 정부 단독입법권을 발동해 연금개혁안을 관철시켰다. 마크롱이 추진한 개혁들이 최선이었는지와는 별개로 그 과정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높은 반대의 벽, 격렬한 시위를 넘어서기 위해 때론 야당의 협조를 얻고, 때론 국민과의 직접 대화에 나서 개혁 추진의 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역성장과 높은 실업률로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던 프랑스의 실업률은 지난해 41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고, 개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마크롱이 올해 초 내외신 기자 200여명이 참석한 기자회견을 연 이유도 다시 개혁의 동력을 마련하기 위한 것일 터. 회견은 TV 시청률이 가장 높은 저녁 2시간 동안 생중계됐고 저출산 대책, 추가 노동개혁, 중산층 지원 확대, 이민 문제 등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요즘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민생토론회가 생중계되고 있다. 굵직한 국책사업이 발표되기도 하지만 질문을 받지 않고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일방통행식 이벤트일 뿐이다. 거기엔 설득도 동의도 감동도 없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건 한둘이 아니다. 고령화 사회의 늘어나는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지, 국가적 과제로 제시한 3대 개혁은 어디 갔는지 알고 싶어 한다. 특히 실효성 없는 연금개혁안을 국회에 낸 것은 사실상 책임회피 아닌지, 노동·교육개혁의 큰 청사진은 있는지 대통령의 답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중요한 질문은 피하고 내 할 말만 하는 군색한 방식에 머물러 있다. 이유는 자명하다. 다른 질문들이 불편하니 외면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많은 외신까지 ‘명품백 논란이 나라를 흔들고 있다’고 하는 마당이다. 어떻게든 그 질문을 피하거나 우회해 보려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고, 통제받지 않는 권력의 절제되지 않은 행보에 대한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 돼 버렸다. 주위에 ‘공작’ 운운하거나, 국민 눈높이를 거론한 여당 비대위원장을 ‘잘라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밖에 없다면 윤 대통령은 고스란히 용산 안에, 그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갇힌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설득자이다. 혹여 억울함이 있더라도 그조차 묻어둬야 한다. 그걸 표현할 자유나 권리는 없다. 먼저 깊이 고개 숙여 사과함으로써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용산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개혁도 정책도 말할 기회가 생긴다.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대통령이 해야 할 본연의 책무 말이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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