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제왕적 대통령제 유감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이 세계의 뉴스가 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주 ‘2200달러짜리 디올 손가방이 한국의 여당을 뒤흔들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영국 BBC방송과 더 타임스, 텔레그래프도 이 사안을 보도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국민이 걱정을 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한 뒤 여당과 대통령실 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 사과를 요구하는 민심에 윤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을 아끼는 지기(知己)가 대신 반성문을 써서 전해주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제왕적 대통령의 시련에는 예외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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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신 같은 천황 권력도 제한
한국, 심부름꾼을 전제군주로 모셔
윤 대통령 ‘명품백 수수’ 대응 주목
지기는 대신 반성문 써준다는데…
」
한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된 것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열여섯 차례의 헌법 기초위원회 회의를 갖고 6월 21일 내각제 헌법 초안을 확정했다.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인 유진오가 주도했기에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동안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며 대통령제로 바꾸자고 했다. 한민당 당수인 김성수가 동의했고,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인 김준연이 연필로 관련 조항 몇 대목을 고쳤다. 유진오는 “기형적 정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날 대통령제 헌법안이 본회의에 넘겨졌고, 7월 12일 통과됐다.
유진오 헌법안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참고했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토대로 자유·평등·복지가 구현되는 국민주권적인 민주국가를 지향했다.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까지 보장하는 진보성도 갖췄다. 하지만 핵심인 권력구조가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급변침한 것은 민주주의 역사를 퇴행시키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아홉 차례의 개헌을 거친 한국 특유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됐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줘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책 결정과 집행을 가능하게 했고,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원적 가치와 민의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전제군주를 복제하는 위험한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일본의 제헌 과정은 오랜 시간 숙성 과정을 거쳤다. 1880년이 되자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열자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눈이 밝은 메이지 정부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1871년부터 서양 헌법 서적을 입수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1880년 12월 원로원이 작성한 헌법안에 대해 “서양 각국의 헌법을 모아서 베낀 것이며 일본의 국체와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원로원 안은 폐기됐다. 이토는 1882년 3월 입헌군주제의 원산지인 유럽으로 떠났다. 독일 헌법 전문가 모세의 강의를 들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 슈타인 교수로부터는 헌법으로 군주권을 제한하는 군주기관설을 배웠다. 19세기 전반 유럽 시민혁명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최첨단 헌법이론이었다. 영국 런던에서도 입헌군주제 운용의 구체적 현실을 점검했다. 1년5개월 만에 귀국했다.
1885년 45세에 초대 총리가 된 이토는 열한 살 어린 메이지 천황이 “실권 없는 로보트 취급을 당한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실제로 천황은 각료들이 국사를 상주(上奏)하려 해도 만나지 않고 사보타주했다. 이토는 천황을 소년시절부터 모신 동갑내기 시종 후지나미를 슈타인 교수에게 보내 2년3개월간 강의를 듣게 했다. 헌법을 몰랐던 말(馬) 전문가 후지나미는 귀국해 천황과 황후에게 33시간 동안 헌법과 입헌군주의 역할을 강의했다. 일본에 군주기관설을 적용하기 위한 치밀한 작업이었다.
이토는 1888년 총리에서 물러나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제헌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노우에 고와시가 만든 초안을 놓고 식사도 걸러가면서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젊은 관료들은 전직 수상의 의견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토가 “자기 의견을 마음껏 말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헌법이 공포됐다(『이토 히로부미』 이토 유키오).
두 나라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이렇게 달랐다. 일본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한국은 거꾸로 심부름꾼인 공복(公僕)에게 전제군주의 지위를 부여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일본은 정교하게 설계된 입헌군주제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토는 조선 병탄(倂呑)의 원흉이었고,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었다. 반면에 한국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 나라는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면 정부와 민간 기업, 범부(凡夫)의 일상까지 집단 몸살을 앓는다. 일류 기업과 한류의 파워로 국가 위상은 올라갔는데 언제까지 이런 전근대적인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악순환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정치권도, 국민도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건강한 권력구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이하경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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