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비즐리의 혁명
이번 학기에는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에서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고대 그리스 도기화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사진). 그리스 미술이라 하면 우리는 보통 서양미술의 근본을 이루고 르네상스 조각상의 모형이 된 인체조각상들을 떠올린다. 혹은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완벽한 비율로 미의 극치를 담았다고 하는 건축물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2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에게 가장 많은 양으로 전해 내려온 그리스 예술품은 바로 도기화다. 현재까지 20만점 이상의 도기화가 발굴돼 전 세계 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도기들이 무덤에 시신과 함께 매장됐기에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다. 도기화는 글로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신화와 일상 생활의 단편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오랫 동안 일상 공예품 취급을 당하며 무시를 당했었다.
이런 관습을 완전해 깨버린 건 옥스포드 대학 교수였던 고고학자 존 비즐리 경(1885∼1970)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도기 화가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그리스 도기화를 흔해 빠진 일상용품에서 르네상스 유화 못지않은 대가들의 예술품으로 변신시켰다. 그리스 도기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랑스럽게 서명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 비즐리 경 이전에는 그 이름은 단순한 기술자 표시였다. 40여 개 이름으로 서명된 수백 개 작품의 연구를 시발점으로 하여 비즐리 경은 거의 1000명의 아티스트를 필체로 식별했다. 그 결과 제자, 선생, 동료, 그리고 도기소들간의 복잡한 관계가 드러났고, 고대 그리스 예술품 제조업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아틀리에 못지않게 개성으로 가득한 활기 넘치는 무대가 되었다. 서양 문화를 구성한 화가들의 개성주의가 이토록 고대 사회의 깊은 구조를 밝혀준 것을 생각할 때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무명의 장인들이 떠올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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