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돌이킬 수 없다
‘문빠·달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만으로 논란이 되고 사과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언론은 “혐오발언 논란 일파만파”라는 보도까지 했다. 불과 5년 전인 2019년 5월, 당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에서 ‘문빠·달창’이란 표현을 쓴 것에 “문 대통령의 극단적 지지자를 지칭하는 과정에서 의미와 유래를 모르고 특정 단어를 썼다”며 사과했다.
‘수박’‘2찍남’ 등 혐오와 조롱이 일상이 된 2024년에 돌이켜보니 생경한 장면이다. 이젠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시대 아닌가. 정치학자 박상훈은 팬덤 민주주의 속 혐오 발언을 “조롱과 멸시의 의미를 담는 비유적 표현으로 상대를 함부로 해도 좋은 존재로 만들며 심리적 부담감과 죄책감도 들지 않게 한다”고 했다.
혐오는 피습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목을 칼로 찌르고,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의 머리를 돌로 내리치는 장면은 섬뜩하고 소름이 끼치게 한다. 그러나 곧 익숙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도 든다. 테러를 규탄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비난은 멈추지 않는 정치인들처럼, 안타까운 듯 피습 영상을 공유하며 조롱을 덧붙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대로라면 예정된 미래는 곧 다가올 것이다. 미국인들은 더는 총기 난사 사건에 놀라지 않는다. 총만 들지 않았을 뿐 우리도 혐오 범죄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돌이킬 수 없다(No return)’. 미국 뉴햄프셔주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압승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이렇게 평했다. 차기 대선뿐 아니라, 차별과 반목으로 점철된 트럼프 시대로의 회귀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도 느껴졌다. 82세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막아서기엔 버거운 현실이라는 걸 전 세계는 알고 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 불린 재일 조선인 작가 고(故) 서경식 도쿄경제대 명예교수는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에서 “선한 아메리카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열세에 몰리고 있다”며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미국을 찾았던 시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처음 당선된 2016년이지만, 현재도 유효한 듯하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원고를 보낸 지난달 영면했다.
굳이 먼 나라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 건 미국뿐이 아니란 걸 말이다. 잇달아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와 정치 테러, 번져가는 혐오를 알고도 묵인하는 소위 윗사람들을 보면 ‘선한 한국’도 열세에 몰렸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 않나.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지고 공동체는 무너져 내린 것일까. 돌이킬 방법이 무엇일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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