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는 엄동설한에 11일을 버틴 민중들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무장(茂長)에 사는 동학교도 돌쇠는 무지렁이 농투성이다. 아울러 남의 땅 부쳐 먹는 소작농으로, 1년 농사 뼈 빠지게 지어봐야 남는 게 없다. 소작료로 절반, 남은 절반의 반이 세금이다. 내년 농사지을 씨 나락에 농자재값을 제하고 나면 헛농사다. 여기에 수령은 갖은 핑계로 빼앗아 간다.
접주가 삼례(參禮)에 가자 한다. 공주에서 집회가 열렸단다. 잇달아 전라감사에게도 신원하자는 통문이 돌아, 11월 1일 삼례에서 모이기로 했단다. 무장에서 삼례까지는 2백 리 길. 쉬지 않고 꼬박 이틀을 걸어야 한다. 동짓달 엄동설한이다.
▲ 흥덕과 고부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혁명군이 넘었다는 굴티에서 바라 본 모습. 고창군 부안면 상등리 고창북중학교 뒷산이다. 사진 가운데 흥덕과 그 뒤로 고부 두승산 등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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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 북서쪽의 역참(驛站)으로, 교통 요충지다. 일찍이 '이리 가면 이리, 저리 가면 전주, 그리 가면 금마'라며 '삼래(三來)'라 일컬을 만큼 물산과 교통, 정보가 집중되던 곳이다.
머리를 푼 전주천이 만경강에 합류하여 흐름이 커지는 곳 북측 구릉에 삼례가 앉아 있다. 비산비야의 지형에 형성된 고을로, 전라도 중심인 전주에서 북쪽으로 함열∼강경∼공주를 잇는 점이지대(漸移地帶)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이 소위 '징게맹게'라 부르는 드넓은 평야 지대로, 어디서든 접근이 수월하다.
▲ 삼례동부교회 삼례 역참이 있었다던 삼례동부교회와 부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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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은 '삼례동부교회' 인근에 있었고, 이곳에서 삼례집회가 열렸다. 동부교회 인근 오랜 마을인 가인, 곰올, 새터의 남측 평야 지대는 큰 변화 없이 아직도 의연하다.
삼례집회
공주집회 성과는, 극심한 탄압 대신 군중의 위협을 감지하고 조정을 핑계로 순간 위기를 모면하려 한 충청감사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체험했다는 점이다. 이런 결과로 동학도인들, 특히 전라도 중심의 남접은 더 큰 자신감을 얻게 된다.
전라 관찰사 이경직에게 글을 보내려 할 때, 도인에게 격문을 날려 11월 01일을 기하여 각지 두령은 자기 포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삼례역에 모이라 하자, 수천 명이 일시에 모여들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41 의역하여 인용)
삼례집회는 모인 군중의 숫자에서부터 공주집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허허벌판에서 진행된 집회라는 점에서, 교단은 물론 삼례 백성들에게도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먹고 자는 문제가 걸림돌이다. 각 포를 중심으로 장막을 치고 각자 며칠 분량의 식량을 지참한 것으로, 이를 해결한다.
▲ 삼례집회 터 왼쪽 재건축 하기 전의 삼례동부교회가 보이고, 그 앞 들판이 삼례집회 터다. 2024년 현재 도시화로 이곳 들판은 사라지고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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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은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손천민을 보내 교단을 대신한다. 여기에 북접에 가까운 전주 접주 남계천(南啓天)을 내세운다. 지도부를 꾸려 도소를 세우고, 손천민이 접주 십 수 명을 배행하여 전라감영에 신원한다.
남·북접의 분화 조짐
전라감사 이경직이 이를 보고 어떤 마음을 먹었을지는 명확해 보인다. 탄압이라는 강경책을 무작정 쓸 수도 없다. 충청감사의 선례가 있어, 여러 대안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또한 허허벌판에서 열리는 집회에 몹시 추운 한겨울이며, 먼 길을 걸어 온 동학도들이 준비한 식량이 많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 전라 감영 복원된 전라 감영. 선화당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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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직의 조치에 군중이 분개한다. 손천민 등 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만 명이 전주로 몰려가 감영에 압력을 행사한다. 더는 속지 않고 원한과 억울함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농민의 주체적 실천이다. 이를 남접이 주도한다. 대규모 군중에 놀란 이경직 역시 조병식처럼 아무런 효력도 없는 답서를 내준다. 무능한 권력 집단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다시 확인하는 장면이다.
소장을 내고, 수만 도유(道儒)가 물러가지 아니하고 전주 부내(府內)에 머물렀다. 9일이 되자 감사 이경직이 또 전과 같은 회답을 주었으나, 그도 하는 수 없이 각 고을에 관문(關文=지시문)을 발송하며 내용에 "동학은 조정이 금하는 바라 각 고을이 마땅히 법에 따라 금해야 함에도, 지금 들어보니 각 고을 수령들이 금단(禁斷)을 빙자하여 돈과 재물을 탈취할 뿐만 아니라 인명을 상해(傷害)함에 거리낌이 없다 하니, 법에 따라 어찌 이런 일을 용서하리오" 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44∼145. 의역하여 인용)
11일에서야 관문이 발송된다. 살을 에는 엄동설한 11일을 벌판에서 버틴 것이다. 그 힘은 무엇보다 수탈을 벗어나려는 열망과 감영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썩은 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의지가 이처럼 삼례에 모인 민중들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교조 신원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을 원했던 농민은 이경직의 처분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단은 이 정도에서 타협하고, 집회를 정리하려 한다. 농민의 열망은 뒷전이다. 손천민 등이 이경직의 유화책에 순순히 응하고 만다. 11일간의 항쟁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강경한 남접과 온건한 교단이 나뉘는 시작점이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동학은 일원화한 지휘체계로 권위가 있었다. 외형상 남접도 순순히 응한다. 또한 강경 일변도로 끌고 가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수만이 먹고 자는 문제 등 물리적 여건도 고려해야 했다. 이에 삼례집회는 외형상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만다.
명망가 몇이 공주집회를 주도했다면, 삼례집회는 수탈에 지칠 만큼 지친 민중이 주축이었다. 삼례집회에서 손화중, 김덕명, 김개남, 전봉준 등이 남접의 주요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집회 이후
근본에서 변혁을 도모하려 했던 남접은, 삼례집회를 통해 구조적 모순을 깨닫고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양도(兩道) 감사의 처분에도, 각 고을 수령의 수탈은 그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한다.
▲ 삼례집회 터 옛 삼례동부교회 앞의 집회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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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접은 삼례집회 성과를 공유한다. 유형의 소득은, 대중의 위협 시위로 양도 감사를 굴복시켰다는 점이다. 조선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승리는 각자 거주지에서도 수령의 수탈에 전처럼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자산이 되었다. 백성들 의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 잘못된 사회에 항거할 줄 아는 계기가 되었다.
무형의 소득은, 같은 처지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뭉쳐 실천함으로써 발휘된 파괴력을 몸소 체득했다는 점이다. 자기 처지를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 승리를 얻어냈다. 개개인은 스스로 비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 여기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 수탈을 이겨내려 행동으로 옮기니 엄청난 파괴력으로 나타났다는 걸 스스로 깨우쳤고, 그 힘을 이제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지렁이 농투성이들이 계급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삼례집회를 마치고 남접의 전라도, 특히 손화중의 무장 포를 중심으로 관의 수탈에 대비한 전술이 마련된다. 단합된 힘만이 유일한 무기임을 확인한 민중들은, 동학을 핑계로 수령이 사람을 잡아가면 모두 나서 수령을 압박하는 위협 시위를 전개한다. 숫자가 적으면 인근 고을과 협력하는 방식이다.
▲ 여러 갈래 길 삼례는 이리가면 이리, 저리가면 전주, 그리가면 금마라 불리던 곳이다. 길은 여럿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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