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딸의 알몸을 그린 엄마, 왜 그랬을까?
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 <편집자말>
[이유리 기자]
"문득 내가 아들 대신 딸 중의 하나를 잃었더라면 이보다는 조금 덜 애통하고, 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보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 자체가 두려워 나는 황급히 성호를 그었다."
소설가 박완서의 책 <한 말씀만 하소서>의 일부이다. 박완서는 1988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다. 그 후 아들을 앞세운 고통과 슬픔을 적은 일기를 모은 책이 바로 <한 말씀만 하소서>이다. 이때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대신 4명의 딸 중 한 명이 죽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고 적었다.
물론 바로 화장실에 가서 울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했다고 덧붙이기는 했지만, 읽는 도중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솔직함 때문이기도 했고, 부모들이 자식을 개별적인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딸과 아들이라는 범주로 보고 있구나! 하는 서늘한 자각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다, 나도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박완서의 이 글이 징그러울 정도로 무서웠던 이유. 동생을 꼭 안은 엄마에게서 '칭찬'을 들은 적 있다. "너는 강하고 씩씩하니까 걱정이 안 돼. 너는 알아서 잘하잖아."
그때 가슴 한켠을 스치고 지나갔던 묘한 쓸쓸함이 다시 내 맘속에 틈입했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자식들이 똑바로 직면하기조차 꺼리는 것, 차라리 진실을 몰랐으면 하는 것, 그만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 바로 '부모의 편애'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방어적인 속담이 있지만, 사실 '반지 끼우는 손가락, 콧구멍 파는 손가락은 따로 있기'도 하다. 오죽하면 성경에도 편애 얘기가 등장하겠는가. '하느님 아버지'는 동생 아벨이 올린 피의 제물에는 미소를 짓고 형 카인이 바친 곡식은 반기지 않는다.
2011년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 대학(UC 데이비스) 연구진이 768명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부모를 조사한 결과 아버지의 70%와 어머니의 65%가 한 자녀를 편애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부모가 자식을 편애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 셈이다.
미국 초상화가 앨리스 닐(Alice Neel, 1900~1984)도 자식을 편애했을까? 스스로 그랬다고 시인한 적 없으니 단언할 순 없다. 그러나 그녀의 딸인 이사베타(1928~1982)는 자신을 '편애의 희생자'로 생각했고, 평생 괴로워하다 죽었다. 이 모녀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1934년 여름 미국에서 찍은 이사베타의 사진. |
ⓒ 앨리스 닐 |
1930년, 가난한 화가 부부였던 앨리스 닐과 쿠바인 엔리코 카를로스 엔리케스는 '예술의 수도' 프랑스 파리로 갈 계획을 세웠다. 엔리케스는 2년 전에 태어난 딸 이사베타를 쿠바에 있는 부모에게 맡길 생각이었고, 닐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딸과 함께 쿠바로 간 엔리케스는 곧 마음을 바꾼다. 저축한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그는 이사베타를 쿠바에 있는 가족에게 남긴 채 아내를 놔두고 혼자서 파리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닐은 광기에 휩싸였다. "처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밤이나 낮이나" 파리에 못 갔다는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쿠바에 가서 어린 딸을 데려오지도 않았다.
닐의 어머니가 이사베타를 돌보는 것을 도울 수 없다고 하자, 그만 양육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닐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늘 끔찍한 이중성에 시달렸다. 난 이사베타를 사랑했다. 당연히 사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사베타는 슬프게도 '엄마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네 엄마는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기 위해 아기였던 너를 비상계단에 내쫓고 방치했다"는 이야기를 고모들에게 듣기도 했다. 얼마나 비참했을까.
물론, 나중에 앨리스 닐 재단 측은 닐을 못마땅해한 시누이들의 악의적인 모함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말이다. 이 역시도 닐이 가타부타 뭐라 말한 적이 없으니 진실을 알 수 없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일생 동안 닐은 이사베타를 단 세 번만 만났다는 사실이다.
이사베타와 헤어진 지 4년이 지난 후에야 모녀는 미국에서 만난다. 닐은 이때 5살이었던 딸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런데 그녀는 의아한 선택을 한다. 딸을 알몸으로 모델로 세운 것이다.(앨리스 닐, '이사베타', 1934-35.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홈페이지)
앨리스가 그린 벌거벗은 이사베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나이보다 크게 그려진 발과 말미잘 촉수처럼 그려진 손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준다. 엄마 없이도 충분히 홀로서기가 가능한 괴물 같은 아이.
어쩌면 닐은 '독립적이고 강한 딸'의 모습을 그리며 죄책감을 지우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시기 미국 방문 중에 찍힌 어리디 어린 이사베타의 사진을 보면 닐의 그림과는 전혀 딴판이기 때문이다.
▲ 앨리스 닐, <목마를 타는 하틀리> 1943년, 캔버스에 유채, 앨리스 닐 재단 |
ⓒ 앨리스 닐 |
문제는 이후에 이사베타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더욱 절망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그림은 '롤리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사베타의 딸 크리스티나 란첼라는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역겹다고 생각해요. 나는 결코 내 아이들을 그렇게 벌거벗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쿠바로 돌려보내진 이사베타는 1939년이 되어서야 미국의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때 닐은 다른 남성 사이에서 또 다른 아들 리처드를 임신한 상태였다. 딸이 버거웠던 닐은 '두 번 다시 쿠바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이사베타를 쿠바로 보내버린다.
2년 후 이사베타는 엄마에게 슬픈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 "사랑하는 엄마, 왜 엄마는 답장을 보내주지 않나요? 엄마에게 카드를 쓰고 또 쓰지만 한 번도 답장을 못 받았어요. 사랑을 담아, 이사베타가."
그 후 모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이사베타가 18살이 되었을 때였다. 이제 이사베타는 더 이상 엄마의 사랑을 애처롭게 간청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사베타는 엄마가 직접 키우는 아들 둘과 달리 자신은 내쳐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가 보살피지 않은 아이
▲ 앨리스 닐, <하틀리, 리처드와 함께 있는 앨리스 닐> 1941~1943년, 종이에 흑연과 잉크, 앨리스 닐 재단 |
ⓒ 앨리스 닐 |
일본의 정신과 의사 오카다 다카시는 책 <나는 왜 형제가 불편할까?>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부모는 자기 손으로 직접 보살피며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온 아이를 더욱 사랑스럽게 여기는 반면, 직접 보살필 기회가 별로 없었던 아이에게는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은 있을지언정 사랑스럽다는 마음이 생기기는 어렵다."
즉 머리로는 좀 더 신경 써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를 무심코 방치하는 일이 벌어지기 쉬우며, 그에 따라 마음은 더욱더 멀어지고 애정을 요구하는 아이들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이가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 더더욱 그렇다. 결국 어린 시절 부모와 관계가 긴밀하지 못했던 아이는, 안타깝게도 잘못한 것 없이 억울하게 미움받는 '나쁜 아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앨리스 닐과 이사베타의 이 만남은 필연적으로 좋지 않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사베타는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지만, 한 번도 엄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닐도 딸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이사베타는 1978년 닐의 강연회에 찾아간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시도도 비극으로 끝났다.
맨 앞줄에 앉아 엄마의 강연도 듣고, 강연 후 열린 리셉션에도 참석했지만 닐은 끝까지 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사베타는 너무 속상한 나머지 자기가 딸이라는 말도 끝끝내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고, 4년 후 우울증으로 자살한다.
어쩌면 앨리스 닐은 이렇게 변명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땐 나도 엄마가 처음이어서 미숙했어" 실제로는 이사베타보다 먼저 태어난 딸이 있었지만, 첫돌도 되기 전에 죽었기에 사실상 이사베타가 닐의 첫아이였다.
그러나 이사베타는 이 말에 이렇게 대꾸할 것 같다. "엄마, 자식도 경력직이 아니야" 언제부터인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라는 말이 변명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으니까'라는 말은 자식이 엄마를 위로하며 해야 하는 말이지, 엄마 스스로가 하는 건 솔직히 민망한 일이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랑해야
'이만하면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도 마찬가지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과 의사 도널드 위니코트가 한 말인데, 정신과 의사 김건종에 따르면 사실 이 번역보다 '크게 나쁘지 않은 엄마'가 위니코트의 의도에 조금더 가깝다고 한다. 번역 과정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말인 셈이다.
'크게 나쁘지 않은 엄마', '크게 나쁘지 않은 아빠'라는 타이틀은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 그냥 얻기 어려운 과제다. 아이가 어릴 적, 나는 틈만 나면 "엄마는 내가 좋아 언니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이때 "너희 둘 다 좋아해"라고 하면, 아이들은 그 말에 절대 만족하지 못했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엄마는 너희 둘 다 싫어해"라고 대답했다. 왁자하게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와 특별히 '케미'가 잘 맞는 아이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의심을 마음 한구석에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같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부모는 매 순간 아이들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예민한 저울은 어느 순간 필요 없게 되지 않을까. 미세하게 균형을 잃은 사랑마저도 기어코 감지해내는 이 저울이 저절로 녹스는 상황을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것이 부모가 해내야 하는 필생의 사명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줄리 필립스 지음, 박재연 외 옮김, 돌고래, 2023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브리짓 퀸 지음,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2017 <나는 왜 형제가 불편할까?>, 오카다 다카시 지음, 박재현 옮김, 더난출판사, 2016 <마음의 여섯 얼굴>, 김건종 지음, 에이도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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