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위로∙임신 소녀에 태교음반…'법으로 치료'하는 판사
“절대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세요.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입니다.”
지난 24일 박주영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형사1단독 부장판사는 부산 최대 규모 전세사기 사건 피고인 A씨(50대ㆍ여)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뒤 피해자들에게 이 같은 ‘당부의 말’을 전했다. A씨는 2020년부터 3년간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사들인 오피스텔 등 건물 9채로 임대사업을 하며 임차인 229명의 전세보증금 180억원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박 부장판사는 탄원서에 담긴 피해자들의 고통을 언급하며 검찰 구형(징역 13년)보다 중형을 선고했다. 이어 피해자들에게 “결코 여러분이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달라”는 위로를 건넸다. 일부 피해자는 그의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형사 사건에도 치료사법 적용하고 싶었다”
판사가 검찰 구형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하거나, 법정에서 직접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건 흔치 않다. 이유를 묻는 중앙일보의 이메일에 지난 25일 회신한 박 부장판사는 “제가 다른 판사와 달리 유별나게 보이는 면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며 “개인적 경험(특히 소년부 판사)도 크게 영향을 미친 듯하다. 소년부는 전통사법이 아니라, 치료사법의 이념이 구현된 영역이다. 저는 이 이념을 성인범(일반 형사사건)에도 접목하거나, 응용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법원이 사건 처벌을 위해 유ㆍ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재발 방지 등 문제 해결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게 ‘치료사법’의 개념이다. 그는 이메일 회신에서 “선고 직후 사건 내용을 직접 언급해야 하는 인터뷰에 응하기는 조심스럽다. 써야 할 판결도 산더미”라고 했다. 다만 본인의 저서인 『어떤 양형 이유』를 참조해달라고 했다.
변호사 거친 경력법관, 소년재판서 ‘치료사법’ 관심
사법연수원 28기인 박 부장판사는 7년간 변호사로 일하다 2005년 판사가 된 경력 법관이다. 2011년 8월부터 1년 6개월간 부산가정법원에서 소년보호재판을 맡았다. 범죄ㆍ비행을 저지른 19세 미만 소년을 교화하기 위해 보호처분을 내리는 재판이다. 이 시기를 포함해 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떤 양형 이유』는 2019년 7월 발간됐다.
박 부장판사는 책의 ‘회전문 집사’라는 꼭지에서 치료사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사건보다는 사람을 지향하고, 소송보다는 소송 이후와 대체적 분쟁 해결을 핵심 절차로 여기며, 심판자보다는 코치로서의 판사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치료사법의 특징으로 소개했다. 이어 "법정에 출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런 당사자에게 문제 해결의 책임이 있다고 치부해 기계적 처벌을 반복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합리적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문제를 심화시킨다는 개념"이라고 덧붙였다.
소년재판 때도 책ㆍ태교음반 건네
책에서 박 부장판사는 청소년이 보호처분을 잘 지키는지를 판사가 유심히 살피고 관리해야 한다는 점을 ‘법원의 후견적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소년부 부임 초기 그는 법정에 선 아이들의 순진해 보이는 모습과 그들의 범죄사실을 연결짓기 힘들었다고 한다. 얼마든지 교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책도 주고, 좋은 말도 해주고, 임신한 소녀에게는 태교음반도 사주고, 피자를 싸 들고 (청소년) 쉼터에도 들렀다’고 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선처해준 아이들이 ‘열이면 열’ 재범으로 다시 법정에 서는 걸 보며 그는 배신감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과 훈계, 위로와 독려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다고 실망하지 말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다짐을 되새겼다.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건네는 한마디 위로의 말과 사랑의 힘을 회의하지 않는다면, 이 아이들이 언젠가 철이 들어, 상처를 동여매 주며 눈물 흘리던 따뜻한 손길을 분명히 기억할 거라고 믿기로 했다"라고도 썼다.
박 부장판사는 지난달 50대 노숙인 B씨에 대한 선고에서도 이런 믿음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B씨는 지난해 9월 부산의 한 편의점에서 함께 술을 먹던 노숙인을 흉기로 위협했다가 특수협박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 부장판사는 B씨가 다른 범죄 경력이 없으며, 범행 당시 들었던 흉기를 스스로 밟아 부러뜨렸다는 점을 들어 그에게 징역 6개월의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사회보장 제도 속에 생활하면서 건강도 잘 챙기라"며 B씨에게 10만원을 함께 건넸다. 혹한 속에 B씨가 찜질방 등에라도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B씨 수사기록에 ‘가끔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는 게 취미’라는 내용을 보고 책도 선물했다. 선물한 책은 중국 소설가인 위화의 장편 소설 『인생』으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삶을 견뎌내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부산=김민주 기자 kim.minju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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