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있으려면

변희주 2024. 1. 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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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을 읽고

[변희주 기자]

 책 제목은 결코 가볍지 않다
ⓒ 민음사
   
충격적인 제목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매력적인 제목. 내용이 어려웠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어냈다. 작품의 첫머리는 니체의 '영원한 회귀' 사상을 말하면서 시작된다. 인간의 삶은 일회성에 그치므로 그 배경으로 영원한 회귀를 가정해 본다면, 인생은 매우 가벼우며 그와 동시에 찬란하다. 그러나 무게가 없다면 인간 존재는 무의미하기도 하다. 가벼움과 무거움 둘 사이에 무엇을 택해야 할까라는 물음은 신비롭고 미묘하다. 이 둘은 양 극단인 동시에 가장 근접한 사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은 모순이 전제돼 있고, 가벼움과 무거움 둘 사이에 무엇이 긍정이고 부정이냐에 대한 답을 내릴 수는 없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작가의 국가와 그 사회적, 시대적 배경이 작품 이해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역사를 지녔듯 이 작품 또한 시대의 우울을 논한 작품이라고 말이다. 키치니, 공산주의니 혹은 체코의 근대사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거듭 반복해서 읽은 지금, 이 작품은 특정 시대뿐 아니라 인류의 본질적인 물음과 철학적 논제를 다루는 고전 문학이라는 점에서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애다. 소설에서 가장 유의하게 읽은 두 가지 명제는 존재와 사랑이었고, 그 결론은 따뜻함이다. 이 소설은 총 7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형식이다. 나는 각 부분을 주요 인물 토마스,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를 테마로 읽었다. 즉, 1부는 토마스의 '가벼움과 무거움', 2부는 테레자 중심의 '영혼과 육체', 3부는 사비나의 '이해되지 못한 말'이다. 4부와 5부는 각각 테레자와 토마스의 얘기가 같은 제목으로 반복되고, 6부는 '대장정'으로 프란츠 혹은 사비나 중심의 이야기이다. 마지막 7부는 '카레닌의 미소'로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개 카레닌, 세 가족의 시골 생활 이야기다.

쿤데라의 말을 빌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쿤데라 자신의 가능성들이라 했다. 소설이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이 이야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지닌 인물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임으로써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준다. 책 제목인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쿤데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애정을 갖고 있고 이를 보면서 나 또한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하릴없음과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을 보였고, 나는 그들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참 많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주요 인물 중, 내가 가장 먼저 관심을 둔 인물은 사비나였는데 존재의 모순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사비나는 줄 바깥으로 나가고, 미지의 세계를 사랑했다. 화가인 그녀가 추구한 예술 세계는 '앞은 거짓이오 사실적인 것이고, 뒤는 진리이며 추상적인 것'의 이중 노출 세계였다. 이를 쿤데라의 화법을 빈다면,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그녀는 늘 배신에 매료됐고, 프란츠와의 사랑이 가장 고조된 순간 그를 떠나기도 한다.

그녀의 이런 행위들은 자신을 구속했던 아버지를 반항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청교도적이었고, 아내의 죽음 바로 다음날 자살할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먼 훗날엔 자신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테레자와 토마시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한 순간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프란츠를 그리워한다. 당차고 강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가 결국엔 애틋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 그녀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두 번째, 사랑의 화두는 테레자를 통해서 읽었다. 테레자는 상대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사랑에 헌신하는 존재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고통을 갖고 있다. 마치 현실 세계의 우리 모두처럼 말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이고, 테레자는 고통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사비나의 경우도 그랬듯이, 테레자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점이 좋았다. 테레자의 역사는 그녀 어머니의 역사였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테레자를 가졌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믿었던 어머니.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가 자랑스러웠고 수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결국 사랑에 배신당한 인생. 어머니는 비뚤어졌고, 테레자의 태어남은 죄악이었다.

테레자는 헌신과 희생을 통해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로부터 '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리고 너의 그 아름다운 육체는 곧 쓸모없게 되어버려. 나처럼 말이야'라고 강요돼온 세계에서 그녀는 탈출하고 싶었다. 테레자가 육체와 영혼의 일원성에 대해 집착한 것도 모든 육체의 가치를 똑같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찾기 위한 애달픈 노력이다. 테레자가 토마시를 사랑하게 된 것은 신분 상승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명제였다.

 나는 쿤데라가 존재의 가벼움이냐, 무거움이냐에 대한 담론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펼쳤지만, 사랑으로서 이야기를 마무리한 점이 인상 깊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 행복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닐까? 토마시의 바람기가 큰 의미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평생을 질투했던 테레자.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 했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은 왜 마지막 순간에야 하게 된 것일까? 그녀가 나이가 들어 성숙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골생활을 시작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카레닌이 죽음의 순간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주요 인물 네 명은 모두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그 전에 깊은 깨달음을 얻는 듯 보였다. 특히 사비나, 테레자, 프란츠는 그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사비나가 얘기하듯, 트럭에 깔린 테레자와 토마시의 죽음은 무거운 분위기였고, 화장을 원한 그녀는 가벼운 상황의 죽음을 원했듯 어떠한 방식으로의 죽음이든 말이다. 쿤데라가 가치를 두고자 한 것은 존재의 가벼움 혹은 무거움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깨달음에 있지 않았나 싶다. 타인의 관심과 시선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행복하다. 그 행복으로 우리 존재는 조금은 의미있고 무거워질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는 어렵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처음 보고, 강물에 버려져 떠내려온 아이처럼 느꼈고 그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녀의 연약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고통을 알았을 때, 그는 그녀를 더 사랑했다. 고통을 가진 존재는 사랑스러운 것일까? 타인의 고통, 혹은 다른 감정을 함께 느낀다면 이는 사랑일까? 나의 대답은 긍정이다.
 
 밀란 쿤데라는 지난해 7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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