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서법 찾던 '운현궁 현판의 서예가', 자연으로 돌아가다
“서예 이론을 공부하다 보니 서예의 근본 이치가 자연으로부터 나왔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산에 올라 큰 붓 휘둘러 글씨 쓴 초정(艸丁) 권창륜의 말이다. 자연에서 서법의 근본을 찾던 그가 27일 자연으로 돌아갔다. 83세.
194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앙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주민등록상 출생은 1943년이다. 한국 서예의 거목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과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 형제를 사사했다. 197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고인은 해박한 서예 이론, 탄탄한 고법을 바탕으로 격식을 깬 뚜렷한 개성의 작품을 내놓으며 현대 서예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서와 예서ㆍ해서ㆍ행서ㆍ초서 등 한문 오체는 물론 사군자와 문인화, 전각에도 뛰어났다. 운현궁 현판부터 청와대 인수문과 춘추문, 남산한옥마을과 삼청각까지 곳곳에 글씨를 남겼다. 2011년 제작된 제5대 국새의 훈민정음체 ‘대한민국’도 그의 작품이다.
“붓글씨의 공력은 단판 승부에 있다. 덧칠이나 가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던 그는 서법을 통달해 자기만의 경지에 이르러야 일필휘지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1990년대 지리산을 시작으로 산에 올라 쓴 글씨가 130여 점. 먹물을 묻히지 않은 상태의 무게만 5㎏이 넘는 큰 붓 짊어지고 산마루에서 세로 7m 큰 종이 펼쳐 현장에서 떠오른 대자연에 대한 외경을 거침없는 기세로 담아냈다. 2007년 백두산에 올라서는 ‘천공교성’(天工巧成: 하늘이 공력을 다해 교묘하게 천지와 만물을 완성했다), ‘영봉’(靈峰: 신령한 봉우리)을 남겼다.
한국미술협회 회장과 한국전각협회 회장, 중국 베이징대 초빙 교수, 동방 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2005년 옥관문화훈장, 2018년 일중서예상 대상을 받았다. 202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2009년부터 고향인 경북 예천에 초정서예연구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 무수한 훈련을 중시하며 끊임없이 자전과 옛 문헌을 찾아보던 그는 "붓글씨에는 인생의 진한 향기가 베어 있다"고 강조했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서예 미학에서 일중의 부드러움과 여초의 강인함을 그림을 방불케 하는 필획과 조형 일체로 두루 녹여냈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9일 오전 10시 30분이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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