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중단 후 미국행, 가수 이상은이 상처를 보듬는 법
[강인원 기자]
ⓒ 고정미 |
1988년 강변가요제 대상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인 이후 <해피버쓰데이>, <사랑해 사랑해>, <언젠가는>, <비밀의 화원>, <사랑할거야> 등의 수많은 히트곡을 내고 있는 이상은의 키는 176Cm. 운동선수나 모델이 아닌 여자로선 무척 큰 키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길쭉한 이상은의 걸어 다니는 모습을 '휘청휘청 거린다'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나는 그녀의 걸음걸이 모양새를 '그녀의 빈틈'이라고 풀고 싶다. 어느 후배가수의 노래 속에 "~그대의 빈틈이 있었으면 사랑했을 것이다~"라는 가사처럼 그녀의 그런 빈틈이 아마 인간적인 친근감으로 팬들에게 어필되었을 것이다.
1988년 여름, 포항의 친구네로 피서를 갔던 어느 날, 현지 식당에 들러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천장과 벽 모서리에 바특이 걸린 TV에선 마침 강변가요제의 결승 시상이 중계되고 있었다. "대상~ 이상은 !"
그러자 길쭉한 사람이 뛰어 올라오더니 무대 위 여기저기를 휘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조금도 가공되지 않은 그런 모습이 상당히 신기하기도 했고 또 한편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 가수 이상은씨(자료사진). |
ⓒ 연합뉴스 |
그해 겨울, 그녀의 첫 앨범 곡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어 이상은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서로 마주 앉아 대면하게 된 순간, 그녀는 내게
"저~ 뭐라고 불러야 될지. 선생님이라고 해도 되나요?"라며 쭈뼛거리는 것이었다. 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선생님 반갑습니다"라며 거침없이 인사를 했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아픔과 만나게 됐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보통사람들보다 더 많은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팔자나 숙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은 예술인들의 삶 속에 항상 맴돌고 있었을 숙명 같은 아픔을 그녀도 상당 부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언젠가 노래 연습 중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저는요. 열쇠를 집어넣어 오른쪽으로 돌렸는데 문이 안 열리면 후회 없이 왼쪽으로 돌릴 거예요."
그 말에 담긴 그녀의 꿈은 쉼 없이 돌고 있었다.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 이후, 수십 명의 음반 제작자, 기획자들이 그녀에게 엄청난 조건들을 제시하며 집요하게 손을 뻗쳤다. 그리고 금전적 상혼이 그녀의 꿈과 사랑에 많은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녀에게 다가온 성공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을 가져왔고, 그 이기적인 다툼들은 그녀가 지니고 있던 소박한 음악의 꿈을 무참히 짓밟아 버릴 수 있는 큰 힘을 갖고 있었다.
1집 음반을 낸 이후 하루도 쉴 새 없이 스케줄에 끌려 다니던 인기가수의 일상에 지친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뉴욕으로 날아가 버린 것은 열쇠를 넣고 오른쪽으로 돌린 문이 열리지 않았기에 후회 없이 왼쪽으로 힘차게 돌린 용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 공연하는 이상은(자료사진, 2017년). |
ⓒ 연합뉴스 |
1989년 어느 날, 나는 모처럼 TV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신곡 녹음을 끝내고 신곡 홍보를 위한 오랜만의 TV 방송 출연이었기에 조금 떨리기도 했다. 당시 같이 출연했던 다른 가수들은 이미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올 때 마다 녹화 공개홀엔 떠나갈 듯 환호성이 가득했다. 나는 조금 위축이 된 상태로 기타를 메고 꾸부정하게 무대에 올랐는데 객석 한편에서 한 그룹이 마구 환호성을 질러대는 것 아닌가.
"인원 오빠 사랑해요~!", "우유 빛깔 강인원"의 플래카드까지 흔들어대며 나의 출연을 환호하고 있었다. 난 어리둥절해하며 노래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왔다. 그날 현장에서 PD를 비롯한 제작진들도 "강인원씨 인기가 이렇게 좋았어?"하며 나를 다시 보는 분위기였다.
녹화가 끝나고 야릇한 기분으로 방송국 주차장을 나서는데 저쪽에서 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사인 요청까지 하는 게 아닌가. 엉겁결에 사인을 해주고 있던 중에 한 학생이 "아저씨, 우리 상은이 언니 팬클럽이에요. 제가 회장이고요. 우리 언니 좋은 노래 만들어주시는 선생님이니까 아저씨 응원하러 가자고 클럽회의에서 결정했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날 하루, 나는 그녀의 팬클럽 덕분에 아주 인기 있는 아이돌 오빠가 되었다.
그 후 가끔씩 여의도 방송국 주변 길가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선생님! 요즘도 밤새우세요? 에이~ 살 좀 찌셔야죠?" 하며 눈이 안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어주곤 또 휘적휘적 바삐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싱긋 웃음짓게 된다.
그녀의 삶 가운데 다분히 철학적이고 진솔한 음악이 꽃피는 날들로 가득하리라. 꼭 노래하는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대중 예술가로서의 모습으로도 많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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