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로 위장취업한 작가, 그가 마주한 딜레마
[김성호 기자]
종종 마주했던 장난이 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도 이따금은 그런 장난과 마주한다. 말하자면 신입 놀리기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선배 중 하나가 저도 신입인 양 장난을 친다. 신입이 겪게 되는 여러 일을 며칠, 혹은 몇 주 간 함께 하다가는 어느 순간 본색을 드러낸다. 제가 실은 누구라고, 신입보다는 한참 선배라고 진실을 털어놓을 때, 그가 저와 같은 신입이라 철썩 믿었던 이는 낭패를 당했음을 직감한다.
장난은 장난일 뿐 누구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하겠으나 당한 이는 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를 철석같이 믿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경우 그와 마음을 열고 사귀었던 순간들이 죄다 거짓으로 돌아가는 게 실망스러울 테다. 나는 진실로 상대를 대했으나 상대는 한 순간도 그러지 않았음을 알 때, 인간은 누구나 배신감을 느낀다.
▲ 영화 <두 세계 사이에서> 포스터 |
ⓒ 디오시네마 |
180일에 걸친 노동취약계층 잠입취재기
어디 노동운동뿐일까. 실상을 알기 위해 실제 현장에 잠입하는 기자며 저술가들 또한 적지 않다. 누구는 병원에서, 누구는 종교시설에서, 또 누구는 일선 노동현장에서 잠입취재에 돌입한다.
대의를 위한 작은 속임일 수 있겠다. 공익을 위하여 신분을 속이는 일에 누구를 해할 목적은 없다지만 자연스레 선의를 가진 이들을 속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마음을 다친다면, 그 행동에 해악이며 악덕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 영화 <두 세계 사이에서>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누군가는 찬사를, 누군가는 배신감을
청소노동의 현실을 비추는 듯 마리안 가까이 달라붙어 그가 마주하는 일상을 잡던 카메라 앞에 어느 순간 놀라운 사실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름아닌 마리안이 어렵게 살아가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제법 이름난 저술가로 취약계층의 노동현실을 취재하기 위해 캉으로 와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다. 취업센터 직원이 그를 알아보았으나 다행히 대부분 사람들은 누군지도 모른 채 일상에 여념이 없다.
영화는 180일 간 최하위 노동자들의 현실을 담은 르포르타주 취재를 다룬 저작 <위스트리앙 부두>를 원작으로 한다. 국제전문 기자 플로랑스 오브나가 2달 간의 휴직계를 제출한 뒤 캉에서 위장취업을 하고 시급 8유로의 청소부로 일하며 겪고 만난 일의 기록이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저널리즘의 한 갈래를 노정한 이후 적잖은 언론인이 시도한 체험일기는 현실을 다루면서도 겉핥기에 그치기 쉬운 언론이 현실을 파악하는 효과적 방법으로 쓰여왔다. 오브나의 르포르타주 또한 그 일환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실 가운데 취약계층 노동자의 이야기를 생생히 담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실은 마음 같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180일이 지난 뒤 그가 제 실체를 밝혔을 때 적잖은 수의 동료가 배신감을 토로했다. 누군가는 공익적 목표에 동감했으나 많은 이들은 그가 저희 자신을 농락하고 희롱했다 여겼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 저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고, 제 성취를 위해 타인의 고난을 몰래 기록하는 모습 또한 모욕감을 준다는 등의 이유였다. 수많은 기자상을 휩쓸며 대외활동에 여념이 없는 오브나의 활동이 그 같은 감정에 불을 붙였으리라.
▲ 영화 <두 세계 사이에서>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긴밀해질 수록 커지는 배신감
악의로 맺어진 관계가 아님에도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또 누구는 상처를 받게 된다. 그 같은 상황이 주는 딜레마가 영화를 이끄는 동력이며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이 되기도 한다. 정체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는 상황의 긴장이며, 정체가 드러난 뒤 떠안는 고민들을 생생히 느껴보는 것이 이 영화를 즐기는 방법일 수 있을 테다.
줄리엣 비노쉬는 한때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력이 완숙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에 반한 그가 직접 원작자 오브나를 설득했고, 그를 위해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엠마뉘엘 까레르를 연출자로 초빙했다 전한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연출 경력까지 있는 저명한 소설가가 본격적으로 상업연출을 시도한 작품이란 점에서도 <두 세계 사이에서>는 지켜볼 만한 대목이 많다. 온통 세상에 먹히는 방법들로 무장한 그렇고 그런 작가들 사이에서 저만의 개성을 그대로 간직한 창작자가 그리 많지만은 않은 시대인 탓이다.
엠마뉘엘 까레르와 줄리엣 비노쉬 외에도 헬렌 랑베르, 레아 카르네 등 출중한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펼치는 영화다. 극적인 서사나 규모 있는 연출은 없어도 시종 초점을 잃지 않는 집중력이 인상적이다. 관객은 극중 마리안이 겪는 감정적 변화를 그대로 느끼며 그가 마주할 수밖에 없던 고민들을 함께 고민하게 된다. 명확한 해법이 없는 상황에서 마리안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앞엔 미처 돌아보지 못한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던 것일까.
▲ 영화 <두 세계 사이에서>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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