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호 지킨 학자관리 이재현

김삼웅 2024. 1. 2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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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70] 이재현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어느 시대나 매국노가 존재한다. 자신들의 작은 이득을 취하고자 나라를 외적에 파는 무리다. 매국노를 한말의 역도들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고려가 몽고(원)의 지배를 받던 시기인 1323년(충숙왕 10), 간신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없애고 원의 내지와 같이 합병하여 한 행성(行省)으로 두기를 청원하였다.

원의 황제는 귀가 솔깃했다. 선왕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대부분 석권하여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전후 7차 40여 년에 걸쳐 고려 정복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스스로 국호를 없애고 지방의 행성으로 만들어달라는 청원이니 어찌 솔깃하지 않겠는가.

당시 고려는 왕의 시호에 조(祖)·종(宗)을 쓰지 못하고, 충렬·충선·충숙·충혜·충복·충정왕 등 '충성 충(忠)'자를 붙야 했다. 연경에 인질이 된 세자가 몽고족 제실(帝室)의 공주를 세자비로 삼은 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사위국'의 굴레이지만 고려라는 국호를 쓰고 있었다.

원나라 황제는 이 때다 싶어 고위 관리를 고려에 보내 조사케 하고 곧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자 서둘렀다. 918년 왕건이 제위에 올라 고려를 창업한 지 400여 년 만에 국호마저 잃게 되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한 관리인 학인이 나섰다. 이재현(李齎賢, 1287~1376)이다. 그 부당함을 논하는 글을 지어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달려갔다. 36살 때이다. 약간 길지만, 주요한 내용이라 옮긴다.

<중용>에 말하기를 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림에 9경(九經)이 있으니 행하는 바는 하나라 했습니다. 끊어진 세(世)를 이어주고, 패하게 된 나라를 일으켜 주며, 어지러우면 다스려지게 해주고 위태로우면 붙들어 주며, 그 쪽에 보내는 물품은 후히 하고 이쪽으로 오는 물품은 적게 하는 것이 제후를 품어주는 것입니다.

<중용>의 글은 성문(聖門)에서 후세에 가르침을 드리운 것으로 빈말이 아닙니다. 그 말한 바를 보면, 이어준다는 것은 내가 또한 다스려지게 해준다는 것이고 폐하게 된 것은 내가 또한 일으켜 준다는 것이며, 어지러워지면 평화를 이룩해주고 위태로워지면 편안하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런 이유도 없이 4백 년의 왕업을 하루아침에 폐절(廢絶)해서 사직으로 하여금 주인이 없게 하며 집안으로 하여금 제사를 끊어지게 하려고 하니, 이치로 따지더라도 될 일이 아닙니다.

새삼 저희 나라를 생각하더라도 지역은 천리에 지나지 않고 산림천수(山林川藪)로 쓸모 없는 땅이 10분에 7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세를 거두어도 조운(漕運)이 두루 되지 않고 백성에게 부과해도 벼슬아치의 봉록을 충당하지 못하니 조정의 용도에 있어서 구우일모(九牛一毛)격입니다. 더구나 지역은 멀고 백성은 어리석으며 언어가 상국(원)과 같지 않아 추사(趨舍: 나아감과 머무름, 사회관행, 크게는 문화)가 중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니, 이 소문을 듣게 되면 기필코 의구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개유해 안돈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왜의 백성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만일에 이 소문을 듣고는 우리 처지를 경계로 삼아 스스로 계책을 얻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집사각하(執事閣下)께서는 세조(世祖)가 우리나라의 공을 알아주던 뜻과 <중용>에서의 가르치는 말씀을 미루어 나라는 그 나라로 두고 사람은 그 사람으로 살게 하여금 정치며 군대를 닦게 해서 이를 울타리로 삼고 우리의 다함이 없는 아름다움을 받들게 한다면 어찌 오직 삼한(三韓)의 백성만 서로 경사스러워 하고 성덕을 찬송하겠습니까. 그 종조사 사직(宗祧社 社稷)의 영(靈)도 장차 명명(冥冥)한 가운데 감읍할 것입니다.(<고려사>, <열전>)

원나라 조정에서는 숙고 끝에 이재현의 청원을 받아들여 고려 국호 폐지정책을 폐기하였다. 이재현은 누구인가? 그의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 경주에서 문정공 전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에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대과에서 병과에 합격하여 관가에 나갔다. 이후 50여 년간 일곱 임금을 섬기면서 고위관리직을 두루 수행했다.

당시 밖으로는 몽고의 침략과 지배, 안으로는 무인통치의 잔재가 친청파가 되어 활개치는 이중의 난세기였다. 그는 최고위 관직을 지낸 관료이지만 권세를 부리지 않고, 본령은 문인 학자였다. 충선왕이 퇴위하고 연경에 만권당을 설치하면서 이재현을 불렀다. 그쪽 학자들과 문장으로 경쟁하려면 이재현의 문재밖에 달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6년간 원에 머물면서 학자들과 교유하고 양국간의 민감한 현안을 해결하는 외교관 역할을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이 신라 말의 최치원에서 조선 초기까지 우리 민족의 명시선집으로 편찬한 <청구풍아(靑邱風雅)>에 그의 시가 16수가 선정될 만큼 우수한 문인이었다. 이 책에 실린 <느낌이 있어>에서 그의 삶의 가치가 엿보인다.

반평생을 글쟁이로 장부들에 부끄럽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말 타는 여행길에 지쳤어라
술상은 조촐한데 등잔 불꽃 떨어지고
변방은 아득한데 새벽달이 외롭거늘
화표석에 천년동안 학은 돌아오지 않았으니
상림의 나무 한 가지를 뉘라서 까마귀에 빌려주고
돈 있으면 곧장 회포 씻어낼 술이나 사오지
시 짓는다 머리와 수염 희게 하지 마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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