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에이즈 감염 2000명 유발한 일본 녹십자와 731부대 그림자(下)
급행열차·비행기까지 동원된 731부대 철수
전후에도 뻔뻔했던 군의들…일부는 자살
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엔도의 뼈저린 반성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시리즈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에 이어
*만주국은 일본 육군 정예부대였던 관동군에 의해 1932년 3월 1일 건국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붕괴할 때까지 중국 동북 사성에 존재했다. 일본 정부가 국내외에 발표한 독립국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왕좌에 앉혔으나 실질적 지배자는 일본 천황이었다. 그에게 절대적 충성을 맹세한 관동군 사령관이 대리인으로서 만주국의 모든 통치 기구를 지배했다. 사실상 대륙판 '일본제국'이었던 셈이다. 광활한 영토는 일본의 대륙 군사 거점이었다. 관동군이 소련 영내로 일제히 진공 작전을 펼치기 위한 전선 기지 역할을 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섬나라 일본은 세계공황 여파로 도시에서 실업자가 넘쳐나고 농촌 지역이 빈곤에 허덕였다. 일본 정부는 어려움을 해결할 기회의 땅으로 만주에 주목했다. 대규모 개척민을 이주시켰다. 관동군이 부족한 지방에는 무장 개척민이나 청년 의용군을 보내 국방을 맡겼다. 그러나 일본의 세 배가 넘는 광활한 영토를 방위하려면 막대한 군사비와 방대한 전쟁자원을 산출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에 들어서 한계에 직면했다. 그 무렵 소련은 시베리아철도 수송력을 강화하고, 시베리아부터 연해주까지 수비 병력을 증강했다. 그 결과 일본과 소련의 군사적 격차는 해가 갈수록 벌어졌다. 일본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영구 지하 요새 건설과 세균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부임한 엔도 사부로는 1920년대 후반 프랑스 육군대학에서 유학하며 독가스를 비롯한 특수무기 개발과 연구에 종사했다. 만주국에 부임하자마자 바로 731부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노몬한 사변 때 세균무기를 사용하려고 했다. 노몬한 사변은 외몽골군 기마병이 노몬한 초원에 흐르는 할하강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려고 국경을 넘은 일이 발단이었다. 단순히 일본의 괴뢰 만주국군과 소련의 괴뢰 외몽골군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가 아니었다. 곧 배후에 있는 관동군과 소련군의 전투로 커졌다. 엔도는 일본군이 육탄전으로 수많은 병사를 잃고 패배가 확실시된 1939년 9월 전쟁터로 파견됐다. 초원에 도착하자마자 소련군과 정전협정을 맺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16일 정전협정을 맺고 시간을 번 엔도는 관동군이 더 이상 대 소련작전을 지속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관동군의 젊은 참모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추가적 소련전 실행을 요구했고, 급기야 반대하는 엔도를 고립시켰다. 엔도는 중앙의 힘을 빌려 추가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관동군 상층부로부터 '소련 공포증'에 걸린 겁쟁이 장군으로 취급받았다. 그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731부대 이시이 시로를 찾아갔다. 세균무기를 군사적 열세를 역전시킬 비장의 카드로 봤다. 그러나 아직 실용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단 사실을 전달받아 다시 군인으로서 정치생명을 걸고 소련전을 피하자며 저항했다.
*엔도는 전후 쓴 저서 '중일 15년 전쟁과 나'에서 이시이 시로를 "부처님과 악마를 품은 사람"이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엔도는 한때 전쟁 지도자로서 책임감을 느껴 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만류로 마음을 다잡고 사이타마현의 미개척지로 거주지를 옮겼다. 농장을 꾸리며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1947년 2월 전범 용의자로 지목돼 스가모 구치소에 갇혔다. 석방 뒤에는 어떻게든 새로운 중국 정부와의 국교를 정상화하려고 선구적 활동에 나섰다. 1956년에는 전직 군인들을 인솔해 푸순 전범관리소도 찾았다.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등을 만나 자신이 저지른 죄에 용서를 구했다. 일본 언론사들은 드라마틱한 사상 전환에 주목했다. 평화주의와 헌법 9조(무장 포기)를 옹호하는 그의 이론과 활동을 크게 보도했다.
*엔도는 1984년 10월 아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저널리스트 요시다 히로시는 엔도의 인생을 기술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극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엔도처럼 전쟁의 역사를 직시하는 넓은 시야를 가진 인물을 지금 일본의 정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여든여덟 살에 엔도는 도쿄에서 자서전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많은 지인과 지식인, 정치인 앞에서 '노병은 사라질 뿐"이라고 인사했다. 필자는 노병은 사라졌지만, 그 빛나는 사상은 지금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뿌리 내려 살아있다고 믿는다. 전쟁은 절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는 세계의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다. 엔도는 '군인에게 무기를 주면 안 된다. 무기를 주면 군인은 그것을 쓰고 싶어진다'고 했다. 세균무기 실전 사용을 검토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쓰라린 경험에서 나온 솔직한 말이다."
*일본 의학자와 의사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추적하는 연구에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된다. 일본 정부가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86년 9월 열린 미국 의회 공청회에서 미국 정부 측 관계자는 압수했던 자료를 1958년 4월 일본 정부에 반환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97년 일본 국회에서 진행된 관련 논의에서 사토 겐 방위청 방위국장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방위연구소에서 4만 건에 달하는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731부대, 정식 명칭 관동군 방역급수부의 활동 상황이나 해당 부대와 세균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고 알고 있다. 관동군 방역급수부를 언급한 네 건이 있었으나 해당 부대의 활동 상황이나 세균전과의 연관성을 알 수는 없었다."
*아사에다 시게하루 작전주임참모는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만주 침공 소식을 듣고 731부대 은폐를 준비했다. 국회 승인은 물론 회계 검사원도 거치지 않고 연간 1000만 엔에 달하는 국비를 사용하는 부대가 세상에 알려지면 천황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장 이시이 시로에게 "귀하 부대의 처치에 관해 조만간 지시할 예정이니 내일 신징 군용 비행장에서 대기하라"는 전보를 쳤다. 아울러 육군성 교통과장이던 다케이 대좌에게 731부대 철수를 위한 특별 급행열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아사에다는 전보 내용대로 신징 군용 비행장 격납고 안에서 이시이를 만나 한 시간가량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지시한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모든 증거 말소, 마루타를 뼈와 재로 만든 뒤 트럭으로 운반해 폐기할 것, 의학자 쉰세 명을 부대 폭격기로 가장 먼저 일본 본토에 이송할 것, 부대원을 한 명도 빠짐없이 열차로 철수시킬 것, 미리 수배해놓은 149사단 공병 한 중대를 동원해 시설을 모두 파괴할 것 등이다. 이시이는 비행기가 떠나기 직전까지 연구한 데이터를 가져가선 안 되겠냐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945년 8월 11일 731부대 전용 선로에 열차 서른세 량이 들어왔다. 제1진은 도고촌 관사의 호동 순으로 탑승해 철수했다. 남은 병사들은 다음 날 마루타를 모두 죽이고 건물을 폭파했다. 교육부 병사들은 8월 14일 오후 7시 마지막 열차로 핑팡역을 출발했다. 이시이는 대본영에 보고하기 위해 파괴한 부대 터를 상공에서 촬영했다. 다롄 출장소로 달려가 필름을 인화한 그는 17일 평양에서 마쓰무라 도모카쓰 참모부장을 만나 최종 상황을 보고했다.
*가라사와 도시오 소좌는 731부대 제4부에서 세균 제조 과장으로 일했다. 부사관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부대원들과 직접 접촉하는, 이른바 중간 관리자였다. 1945년 8월 17일 다케다노미야(미야타 참모)로부터 지시받아 무장 해제된 그는 9월 1일 펑톈에서 소련군 포로가 됐다. 관동군 수뇌들과 마찬가지로 하바롭스크로 이송됐다. 소련군은 도쿄 재판에서 세균전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731부대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다음은 가라사와의 회고다. "소련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헤이룽장 연안에 있는 공산당 고위관 별장에 40일 정도 연금됐다. 귀찮게 불러대서 자나 깨나 이시이 시로의 부대에 대해 따져 물었다. 하지만 관할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우리 주장이 모두 딱 맞아떨어지자 결국 포기했다. 이렇게 입을 맞춘 덕에 (사실이 발각될 때까지) 2년이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소련 내무성은 광범위하게 수용소를 조사했다. 간첩까지 동원해 대소련 정보 관계자, 파괴 모략 및 세균전 연구 종사자들을 찾아냈다. 이들을 하바롭스크에 있는 수용소 스물네 곳에 모아 추궁했는데, 당시 세균전 관계자로 지목된 사람은 100명에 달했다.
*가라사와는 45분소에서 조사받았다. 처음에는 관계없는 척 위장했지만, 멀리 떨어진 쿠릴 열도 우루프섬에서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사사키 고스케가 체포되자 더는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인체실험을 비롯한 731부대 실태에 대해 처음으로 온전히 털어놓았다. "저는 이 연구에 참여해 (중략) 실은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나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연구와 실험에 대해서 일본 군인 가운데 누군가는 꼭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박애를 위해 의술에 종사하는 한 명의 의사로서 그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하바롭스크 재판에는 연일 1000명이 넘는 방청객이 몰려들었다. 법정 상황은 모스크바 방송 등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재판에서 가라사와는 교정 노동수용소 금고 20년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북동 방향으로 250㎞ 떨어진 이바노보시의 체른치 마을에 있는 제48장관 수용소에 수감됐다.
*소일 공동선언이 이뤄지면서 가라사와는 특별사면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세탁실 기둥에 끈을 묶고 목을 맨 채로 발견됐다. 그의 부인 도요코는 자살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본토에 돌아와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어요. 전우 여러분께 죄송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일본인들이 절대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듯해요. 아무리 전시 중 책무를 다했을 뿐이고, 나라를 위해 한 것이라 해도 변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731부대에서 동상을 연구한 요시무라 히사토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연구 궤적을 돌아보며 '희수회고'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그는 '전쟁 참여'와 '마음속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는 장에서 은사와의 추억 등을 떠올리며 731 세균전 부대에서 저지른 범죄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포탄에 쓰러져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고 잔혹함을 느끼는 동시에 전쟁터에서 내가 해온 연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선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지 못하면 학문이든 활동이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리학은 자연의 위협을 어떻게 견뎌내고 살아남을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요시무라는 731부대에서 저지른 악행에 대해 "전쟁 중이었잖아요. 모르면 공부나 하세요"라며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곤 했다. 전쟁에 참여한 대다수 일본인의 공통된 인식이다. 죄의식을 느낄 만한 일을 모두 전쟁이라는 상황과 상관의 명령 탓으로 돌리고 만다.
*요시무라는 중국에서 귀환하고 1956년 홋카이도 도후쓰호에서 진행된 빙상 내한 훈련에 참여했다. 남극지역 관측대 일원으로 의학 지도를 맡는다는 명분이었다. 731부대에서 했던 동상 인체실험의 연장 실험을 남극 관측이란 명목 아래 국가사업으로 행한 것과 다름없었다.
*오사카부보험의협회는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개업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6200명 규모의 의사단체다. 이들은 2000년 9월 열린 정기총회에서 20세기를 되돌아보고 다음 세기를 전망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20세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의사들도 관여했으며 비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의사마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반성하며, 21세기를 핵무기와 전쟁 없는 평화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을 결의한다." 그런데 당시 회원 의사 대부분은 일본의료단(1942년 설립된 특수법인) 총재를 회장으로 받들었던 관제일본의사회 출신이었다. 군의로 전쟁터를 전전하고 시베리아에 억류된 뒤 귀환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시에 의사와 의학자 대부분이 천황제 지배와 군국주의 체제에서 꼭두각시가 돼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에 동원된 건 사실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지배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물론 관동군 731부대로 대표되는 생화학무기 개발과 인체실험, 규슈대학에서 발생한 미군 포로의 생체해부, 종군위안부 관리, 중국 침략을 위한 아편 정책 등 비인도적 범죄에 깊이 관여한 의사·의학자도 여럿 있었다.
*1983년 가을, 도쿄 간다의 헌책방에선 '관동군 방역급수부 연구 보고'를 비롯한 731부대 관련 자료가 다수 발견됐다. 언론에 보도돼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여섯 실험에 관한 기록에는 육군 군의 소좌 이케다 나에오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 그가 세간에 알려진 건 이보다 빠른 1981년 10월이다. 마이니치신문에 '생체실험, 나는 했다. 세균부대 전직 군의의 고백', '미국과의 면책 협상도 인정', '원숭이 취급으로 생체실험 관동군 부대, 전직 군의는 전시의 상식이라며 태연하게 주장, 전범 추궁만이 유일한 두려움'과 같은 표제를 단 인터뷰가 실렸다. 당시에는 실명이 아니라 'A 전직 군의'로 소개됐다. 기자들이 접근할 수 있던 건 미국 저널리스트 존 파웰의 논문 때문이었다. 파웰은 정보공개법을 이용해 입수한 극비문서를 바탕으로 미국이 거래를 통해 731부대의 생체실험 데이터를 받는 대신 부대와 부대원들의 전범 소추를 면책했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마이니치신문은 논문에 기재된 군의 이름을 단서로 오사카 시내에 거주하는 개업의 A를 찾아내 인터뷰했다. 바로 이케다였다.
*이케다는 마이니치신문과 인터뷰에서 "전쟁 중에 중국인들에게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를 주사하거나 감염시키는 생체실험을 직접 수행했다"고 고백했다. 생체실험을 당한 사람들이 그 뒤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는 "제가 관여한 실험에서도 중증 환자가 나왔는데 모두 목숨은 건졌다. 동료였던 육군 기사가 이러한 환자들의 생체를 해부하길 원했지만 나는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생체실험에 대해선 "이봐, 전쟁 중이었다고. 그리고 전쟁 뒤 분명 도움이 되고 있지 않나"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면서도 "사실 미군이 전범 추궁하러 찾아올까 봐 전쟁 뒤에도 늘 두려웠다. 내 이름을 (기사에) 내면 절대 안 돼"라고 당부했다. 이케다는 개업의로 활동하는 동시에 오사카부 간호전문학교에서 강사로 일했다. 일본전염병학회와 오사카부의사회 등에 논문도 왕성하게 기고했다.
*이케다는 1975년 8월 오사카보험의잡지에서 특집으로 다룬 '나의 전후사'에 '한 늙은 의사의 술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나는 육군 선박 연습부 고급 군의 직에 있었다. 나카지구 경비대장이던 요시무라 노부요시 중장의 지도하에 나카지구 위생 대장으로서 2000명에 이르는 비참한 원폭 부상자를 밤낮으로 치료했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슬픈 추억"이라고 회고했다.
*일본에선 전후 제약업체와 일본 후생성의 유착, 그리고 이윤에 눈이 먼 기업의 비인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 적잖게 벌어졌다. 일본 녹십자의 비가열 혈액제제 사용으로 발생한 에이즈 감염 사건이 대표적 예다. 혈액을 가열처리해야 바이러스가 비활성화되는데, 일본 녹십자가 혈우병 환자들에게 비가열 혈액제제를 사용해 HIV 감염자가 발생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이 비가열 혈액제제를 수혈받아 에이즈에 걸린 혈우병 환자는 약 2000명이다. 일본 녹십자는 731부대에서 페스트를 연구하고 731부대 중추 기관인 육군군의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던 나이토 료이치가 창업한 일본혈액은행의 후신이다. 전직 731부대 부대원들이 다수 고용됐다.
*수많은 의학 및 약학 관계자들과 731부대 연구자들은 전후 731부대 관계자들이 백신 제조업에 뛰어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구체적 사실로 검증된 경우는 많지 않다. 실제로 대다수 문헌에는 전쟁이 끝난 시점부터 일본혈액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역사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일본혈액은행은 오사카시 조토구에서 창설됐다. 1950년 5월 18일 한 요정에서 발기인총회가 열렸다. 참가자는 오카노 기요히데 국무대신, 하시모토 쇼고 다이고영양화학 이사, 니혼스기 긴이치 오사카부의사회 이사, 와타나베 다다오 산와은행 은행장, 오카자키 쥬 고베은행 은행장, 고바야시 요시오 고베은행 부은행장, 나이토 료이치 전직 육군군의학교 교관, 후타키 히데오 정계지프(잡지)사 사장, 미야모토 고이치 일본특수공업 사장, 마에다 마쓰나에 일본적십자 평의원 등 열한 명이었다. 이 가운데 미야모토 사장은 731부대에서 직접 일하진 않았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독점권을 부여받아 731부대를 위한 여수(濾水)기를 생산한 인물이다. 전시에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는 이시이 시로가 고안한 우지식 폭탄으로 불리던 세균전용 도자기 폭탄을 제조하기도 했다.
*발기인 가운데 한 명인 나이토 료이치 전직 교관은 731부대와 육군군의학교의 핵심 인물이다. 전후에는 도시바 생물이화학연구소에서 니가타지소장을 맡았다. 그 뒤 이바라키시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나이토 의원을 개원했다. 그는 미국이 731부대를 조사할 때 통역을 맡는 등 의사로서 본업 이외에도 다양한 일에 관여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육군군의학교에서 연구했던 건조인간혈장 기술을 토대로 일본혈액은행 설립을 주도했다.
*도시바는 전기기기 제조 회사로 알려졌으나 전시와 전후 상당 기간 백신과 전자현미경을 만들었다. 회사 이름은 도시바 생물이화학연구소였다. 이 회사의 니가타지소는 원래 1944년 4월 개설된 육군군의학교 니가타출장소였다. 페스트와 콜레라, 티푸스 혈청 제조와 세균 배양, 폭탄 제조 등이 진행됐다.
*일본혈액은행 상무이사였던 고야마 에이지는 '양말본청'이란 군사기관에서 일했는데, 시설 관할 지역인 다네가시마에서 깜부기균도 연구했다. 깜부기균은 곡물을 말려 죽이는, 고로 적군 식량에 타격을 주는 비밀무기나 다름없었다. 나이토 료이치가 공들여 개발한 풍선 폭탄에 넣어 퍼뜨릴 계획이 있었다.
*일본혈액은행 나고야플랜트 소장 노구치 게이이치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교수였던 기무라 렌의 권유로 731부대에 투입됐다. 자신의 이름을 딴 제4부 노구치반 반장으로서 페스트균, 비탈저균의 동결건조 및 백신 연구를 주도했다. 노구치는 전후 나고야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다가 나이토 료이치의 제안으로 나고야플랜트 소장에 부임했다. 당시 그는 나이토에게서 1953년 한국전쟁 휴전으로 전쟁터에 납품하던 건조혈장이 남아도니 혈액을 팔아달라고 부탁받았다고 한다. 노구치는 이름만 빌려주고 실무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731부대의 핵심 인물로 증언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혈액은행 이사장이던 후타키 히데오는 731부대에서 주로 결핵을 연구했다. 투베르쿨린과 백신 제조, 성병에 관한 연구 검사도 진행했다. 그는 전후 고향인 가나자와로 돌아가 잡지 흥론을 발행했다. 1946년 도쿄로 상경해 잡지 이름을 '정계지프'로 개명했다. 후타키는 1953년 참의원 선거 지방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노무라증권 등 회사 열아홉 곳으로부터 6435만 엔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됐다. 기소돼 196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일본혈액은행 주요 주주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시카와 다치오마루는 731부대에서 병리를 연구하면서 다롄위생연구소를 운영했다. 그는 1943년 7월 일본으로 돌아와 가나자와의과대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서 확보한 850 증례의 표본을 몰래 숨겨 귀국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그의 아버지인 이시카와 히데쓰루마루는 교토대학 명예교수다.
*역시 주요 주주 가운데 한 명이었던 오타 스미는 관동군 방역급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단계부터 참여한 초기 멤버다. 731부대가 핑팡 지역에 터를 잡은 뒤 인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많은 문헌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보다 앞선 1935년과 1936년 하얼빈 교외에서 두 차례 생체를 실험했다. 첫 번째는 중국인 포로 열 명에게 청산가리를 마시게 한 다음 사망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두 번째도 실험 내용도 같았다. 대상만 러시아인 포로 열 명으로 다를 뿐이었다. 오타는 731부대 제2부장과 제4부장, 사카에 1644부대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이끌던 제2부에선 실전을 연구한다며 탄저균을 이용한 인체실험도 강행했다. 1947년 미국 측 조사관이었던 노버트 펠이 작성한 '펠 리포트'에 관련한 기록이 담겨 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시로 돌아가 개업했으나 두 딸이 죽자 자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에 주둔한 미국 점령군은 소련 검찰관이 731부대 관계자의 심문을 요구하자 난처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에 일본의 생물전 데이터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 매우 가치가 높으며 '전범' 소추보다 훨씬 중요하다. (중략) 국가 안전을 생각할 때, 일본의 생물전 전문가를 전범에 처해 그 정보를 다른 국가가 입수하게 하는 것은 유리한 계책이 아니다. (중략) 얻은 정보를 내부 정보망에 잘 보관해야지, 전범 증거로 사용해선 안 된다." 이는 미국에서는 '모른다', 일본에서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국민 의식상태가 형성된 이유일 수 있다.
*마이클 프란츠블라우 캘리포니아대학 피부과학 교수는 "731부대 문제에 대한 외면은 일본 의사들이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다니엘 위클러 하버드대학 공중위생학부 교수는 "과거 세대의 잘못이 은폐됐을 경우 현세대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중략) 또한 미국과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는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참고 자료 : 15년 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엮음·하세가와 사오리-최규진 번역·발행처 건강미디어협동조합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2020)', 김창권 지음·발행처 나눔사 '일본 관동군 731부대를 고발한다(2014)',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지음·스즈키 아키라 번역·임상혁 감수·발행처 건강미디어 '731부대와 의사들(2015)', 니시노 루미코 지음·한국번역연구원 번역·발행처 예림당 '731부대 이야기(1995)', 진청민 지음·하성금 번역·발행처 교문사(청문각) '제731부대의 진상을 파헤친 일본군 세균전(2010)'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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