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다이어리]고맙다는 말
미국 뉴욕에 온 첫해에 거주했던 곳은 지어진 지 약 100년 된 빌딩이었다. 비싼 월세를 주고 구한 집임에도, 오래된 나무 현관문은 뒤틀려있었고 창문은 살짝 내려앉아 잠기기는커녕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다. 갈라진 나무 바닥에서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입주 첫날엔 괜한 걱정에 사이렌 소리를 배경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14층 창문으로 누가 스파이더맨처럼 날아올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며칠이 지나자 이런 생활도 익숙해졌다. 좁은 스튜디오는 혼자 거주하기엔 나쁘지 않은, 안락한 휴식처였다. 하지만 위기(??)는 곧 닥쳤다. 그해 늦여름, 가족이 우르르 뉴욕을 찾은 것이다. 인근 호텔을 따로 잡으려 했지만, 어머니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가는 건데 무슨 소리냐. 단 며칠이니 좀 불편해도 같이 지내자"고 하셨다. 물론 얼마 안 돼 모두 이 결정을 후회했지만.
뜬금없이 당시 TMI를 푼 이유는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집’에 건넨 인사 때문이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문 앞에서 벽을 쓰다듬으며 "너도 고생이 많았다. 정말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잠시 멈칫했다. 언젠가 시트콤 ‘프렌즈’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자리에서 다 같이 웃거나 타박하지 않았던 건 그 말속 진심, ‘감사의 마음’이 100% 전해져서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은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오래된 사진처럼 남아 가끔, 느닷없이 떠오르곤 한다.
감사를 표현하는 법은 크게 세 단계라고들 한다. 일상 속에서 작은 것이더라도 감사의 순간을 찾고, 무엇이 고마운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그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설명처럼 쉽지는 않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친해진 한인들과 대화하다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이나 상대에 대한 칭찬이 영어론 편히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한국어론 낯간지럽다는 것이다. 이 말을 꺼낸 이는 표현의 차이, 문화의 차이인가라고 덧붙였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한국인의 정서상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부분도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잠시나마 미국에 거주하면서 나 자신도 일상 속 감사 표현이 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 도시에서 이방인으로서 살며 서럽거나 질릴 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길을 걷다가 인종차별적 쌍욕을 면전에서 들으며 공포에 떤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갑작스러운 쓰레기 세례에 며칠간 마음이 복잡했던 적도 있다. 지하철 플랫폼에선 못 볼 꼴도 참 많이 봤다. 그럼에도 나의 뉴욕 생활이 풍성했던 것은, 일상 곳곳에서 좋은 모습들을 더 많이 봐서다. 서로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일상 속에서 작은 칭찬을 건네는 것, 상대의 배려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
이 글은 뉴욕 특파원으로서 쓰는 나의 마지막 ‘뉴욕 다이어리’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공식 근무일이다. 지금 이 순간 감사할 것이, 감사를 표현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공적으로는 특파원으로서 세계 금융, 문화 중심지 뉴욕에서 생생한 현장을 취재할 수 있었던 것에, 사적으로는 큰 사고 없이 건강하게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뒤에는, 타지 생활에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마치 준비된 선물처럼 만나게 된 수많은 인연이 있었다. 녹록지 않았던 나의 짧은 뉴욕살이에서 때로는 기쁨이, 때로는 의지가 돼줬던 이들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해의 첫 달이 거의 지나갔다. 다들 어떠한 첫 달을 보내셨는가. 바라건대 모두가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늘 감사하는 한해, 그보다 더 나아가 감사를 표하는 한 해가 되길. 나 또한 다가오는 설은 한국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일상 속에서 늘 감사를 표현하는 한 해를 결심해본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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