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치한약 빼고는 이미 '무전공' 아닌가요?" 아이의 섬뜩한 말

서부원 2024. 1. 2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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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대학과 교육부의 무전공 입학 확대 방침 유감

[서부원 기자]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해 11월 16일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수험생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자료사진)
ⓒ 사진공동취재단
"'의치한약' 빼고는 모두 별 볼 일 없다는 뜻 아니겠어요?"

서울 지역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무전공 입학 정원을 확대한다는 뉴스에 한 아이가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대학마다 자유전공학부라는 이름으로 신입생을 선발해 오던 터다. 그는 간판만 바꿔 단 것일 뿐, 전형과 커리큘럼 등은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고 확언했다.

서울대는 자유전공학부의 정원을 대폭 늘려 '학부 대학'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를 신호탄으로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등 사실상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모두가 무전공 입학 확대 논의에 착수했다. 당장 2025학년도 대입부터 적용하겠다며 잰걸음이다.

아직 대학마다 구체적인 선발 인원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기존 자유전공학부의 운영 방식과 대동소이 할 걸로 보인다. 입학 후 기초, 교양과목을 수강하고 이듬해 자율적으로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일부 대학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공을 정해 입학하는 경우라도 언제든 전공을 바꿀 수 있도록 규제를 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물론, 자유전공학부에서 '의치한약'을 선택하는 건 불가하다. 무전공 입학의 확대는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며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진로를 탐색해보라는 취지일 테지만, '의치한약'으로의 진로만큼은 대입과 동시에 정해진다는 뜻이다. 아이가 무전공을 두고 별 볼 일 없다고 비아냥거린 이유다.

인문학과 기초과학은 어쩌나

대학들의 갑작스러운 무전공 입학 확대 바람은 교육부가 이를 조건으로 재정 지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올해 초 교육부는 당초 2025년 입시부터 대학 유형에 따라 20~25%이상의 학생을 무전공으로 선발해야만 대학혁신지원사업(8852억 원), 국립대학육성사업(5722억 원) 등을 통해 재정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대학들의 반발로 인해 교육부는 지난 24일 무전공 신입생 비율을 충족하는 대학에만 재정 지원을 한다는 사실상의 '무전공 의무화' 방침은 철회했지만, 무전공 선발 비율과 재정 지원을 연계하는 방식은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십수 년째 이어진 정부의 등록금 동결 정책으로 '돈줄'이 마른 대학의 입장에서 거부하기 쉽지 않은 유혹이다. 이미 자유전공학부라는 제도를 운영 중인 상태에서 사실상 모집 인원만 늘리는 것이어서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다. 이러한 추가적인 국고 지원 방침에 솔깃하지 않을 대학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 당장 대학교수 사회에서 반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무전공 입학 확대가 그러잖아도 소멸 위기로 치닫고 있는 인문학과 기초과학을 붕괴시킬 것이라는 우려다. 얼마 전엔 국공립과 사립 인문대학 학장들이 한데 모여 반대 기자회견도 열었다.
 
 전국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와 전국사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가 24일 교육부의 무전공 입학생 확대 방침이 기초학문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며 추진 중단을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날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인문대에서 강창우 서울대 인문대학장 겸 전국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 협의회장이 입장문을 읽고 있다.
ⓒ 연합뉴스
학령인구의 급감으로 대학의 인문학은 직격탄을 맞았다. 이젠 대학의 입학 정원이 고등학교의 졸업자보다 많은 상황에 접어들었다. 최상위권이 죄다 '의치한약'으로 몰려 이공계열조차 '이삭줍기'라는 푸념이 들리는 형국인데, 인문학 전공자들은 '문송합니다'를 되뇌며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무전공 입학 확대 방침은 고등학교 현장에도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시 전형의 비중이 높아질 게 불 보듯 환하다. 무전공 입학에 학교생활기록부의 세부 능력을 굳이 따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을 통해 파악하려는 게 지원자의 '전공 적합성'이다.

지금도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한 '정시 파이터'가 나날이 늘고 있는데, 무전공 입학 확대가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게 뻔하다. 비율도 비율이지만, 선택지가 늘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아직 전형이 발표되기도 전인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아이들이 여럿이다.

그러다 보니 내년부터 전면 시행될 고교학점제와도 충돌한다. 오로지 내신 성적으로 좌우되는 학생부교과전형에서도 등급을 산출하는 상대평가 방식이 유지되는 한 고교학점제는 파행이 불가피하다. 하물며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은 취지나 운영 방식에서 고교학점제와는 상극이다.

고교학점제까지 위협하는 무전공 확대

기실 고교학점제는 고등학교 교육과정 속에서 각자의 적성과 진로를 탐색하도록 고안된 제도다. 대학처럼 각자 듣고 싶은 교과목을 선택해 수강하고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무전공 입학의 확대가 자칫 고교학점제에 대한 불신을 부추겨 고등학교의 진로 탐색 과정을 형해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재정 지원이라는 당근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교육부도 나름의 이유를 댄다. 대학 신입생의 60% 안팎이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찾지 못한 채 입학한다는 정책 연구진의 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아이들에게 대학에서 진로 탐색과 전공 선택의 기회를 더 제공하자는 취지다.

아이들을 위하는 교육부의 '선의'를 의심치 않지만, 진단과 해법이 서로 어긋난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적성과 진로를 찾지 못했다면, 초중고 과정의 진로 탐색 활동 내실화를 위해 지원하는 게 먼저다. 초중고가 역부족이니 대학에서 진로 탐색 활동을 도우라는 지시일까.

단언컨대, 초중고 교육의 팔 할은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진로를 탐색하는 활동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취학 전부터 사교육이 횡행하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찌감치 '의치대반'이 꾸려진다. 중학생만 돼도 'SKY,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학벌 서열을 줄줄 꿴다.

어릴 적부터 주야장천 대입 준비를 위한 문제 풀이만 하도록 방치해놓고선,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찾지 못했다며 학교를 짐짓 나무라는 건 무책임하다 못해 뻔뻔한 처사다. 취미는 '잠자기', 특기는 '단어 암기'라고 적은 한 아이의 자기소개서는 학교 교육을 향한 조롱에 가깝다. 이럴진대, 내실 있는 진로 탐색 활동을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다.

부디 무전공 입학 확대에 투입될 재정과 관심의 반의반만이라도 초중고의 진로 탐색 활동 내실화에 힘써달라. 이를 아이들의 상당수는 대학에서의 전공이 무의미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공이 무의미해지면 결국 대학의 '간판'만 남게 될 테니 학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거라고 입을 모은다.

자유전공학부에 진학한 한 졸업생은 자신의 대학 1학년 생활을 '고4'로 표현했다. 등급 경쟁에 짝꿍마저 경쟁자로 여기는 고등학교 생활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뜻에서다. 당해 성적에 따라 전공 선택권이 주어지기에 고3 수험생 때처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토로했다.

대학의 '간판'은 고3 때 정해지지만, 대학에서 1년을 보낸 뒤 다시 인기 학과와 비인기 학과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거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오직 한 가지, 취업에 유리하느냐 여부다. 그는 피 말리는 점수 따기 경쟁 속에 고3 때 못지않은 대학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철부지들의 억측과 푸념이라고 무질러선 곤란하다. 고등학교에서 최상위권은 죄다 '의치한약'을 꿈꾸고, 대학에선 인문, 사회는 물론, 경영, 경제까지 문과 계열이라면 전공과 상관없이 로스쿨 진학을 염두에 둔다. 대학은 이미 '의치한약'을 제외하곤 무전공이 보편화한 현실이다. 아이들의 눈에조차 무전공 입학 확대 방침이 한가해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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