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나는 평양에 갔다
평양의 젖줄, 대동강 위 양각도 호텔 떠나…만경대, 김일성광장, 주체사상탑, 김일성경기장 등 둘러봐
남북화합주 마시며 금방 같이 살 줄 알았지만 20년 지나도 그대로…우리 핵무장 및 북한 붕괴 고민할 때
당장은 미중의 대만 힘겨루기에 균형외교 절실한데…용산 참모들은 김건희 여사와 가깝다 얘기만 들려
그러니깐 그해 봄, 나는 평양에 갔다. 수습과 사회부 잔바리(말진 기자)를 마치고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크맨(전담 기자)으로 정치부 생활을 시작한 후 잠깐 국회·정당을 떠나 외교안보 쪽을 취재하고 있을 때였다. 옮기게 된 계기는 타의에 의한 배려가 강했다. 대선이 있었던 2002년, 전세버스 하나에 몸을 싣고 전국의 유세를 따라다니는 이른바 유랑 취재로 집에는 1년 내내 70일 정도 밖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후유증은 서른 살의 심신도 무너뜨릴 만큼 참혹했다.
기자의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가엾게 여긴 당시 부장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심정으로 마련해준 도피처가 외교안보였고 또 하나, 개인적으로는 기사 욕심도 있었던 것 같다. 국회·정당 기사가 누가 왜 싸우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만 쓰면 되는 워딩(wording)의 기사라면, 외교안보 기사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반드시 공부하고 써야 하는 히스토리(history)의 기사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부 기사 가운데 가장 고급지고 세련된 기사로 꼽히는 것에 대한 묘한 경외심과 승부욕이 발동됐고, 이는 이후 8번이나 끌려갔던 중국 베이징 6자회담 장에서 제법 만개할 수 있었다.
2000년 6월,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직후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활황 그 자체였고, 당시 남북교류의 또 다른 진앙지였던 종교방송사에 머물렀던 이력까지 더해져 북한의 3대 취재포스트라고 불리던 금강산과 개성, 평양을 십여 차례 다녀올 수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기억이 남은 출장은 2006년 4월 26일부터 28일까지 대한광업진흥공사 주최 정촌흑연광산 준공식에 통일부 풀 기자로 참여한 것이었는데, 이 공식 혹은 비공식 일정에 평양과 묘향산 방문이 포함돼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직항로가 개설되지 않았는데도 인천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까지는 아시아나 전세기로 40분이면 충분했다. 평양의 젖줄, 대동강 위에 지어진 양각도 호텔(95년 개장, 숙소)을 떠나 북한의 국화, 목련의 그윽함이 코끝에서 지루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에 이르렀다. 온갖 치장과 꽃단장으로 버무려진 생가는 생각보다 볼품이 없었지만 금수산 모란봉의 기개만은 이어받은 듯 위풍당당했다. 당시 비가 오는데도 북한 보위사령부(지금의 보위국)에서 그렇게 우리 일행을 독려한 것으로 봐서는 반드시 만경대만큼은 참관하게 하라는 당의 지시가 있었던 듯했다.
반만년 여법하게 주유했던 한민족의 삶을 순식간에 곡성(哭聲)의 진창으로 빠뜨리고 이산(離散)의 구렁텅이로 내몬 저주의 악령... 한 때, 수많은 천재를 삼킨 주체사상의 유혹에 매료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아득하고 막연한 추상일 뿐 더 이상 놀라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이름의 주인...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일명 주석궁을 지나 김일성 광장으로 향하면서 그에 대한 설익은 감상과 분노를 제어할 수 없었는지 당시 메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광장은 크게 주석단과 인민대학습당을 축으로 대칭으로 구성돼 있었고 그때만 해도 광장 중앙에는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와 더불어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화도 함께 전시돼 있었다. 흐르는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놓인 주체사상탑은 너무 커서 한 눈으로 음미하기에 몹시 버거웠던 기억이 난다. 위용을 과시하려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사장시킨 듯 했다.
만수대의사당(우리의 국회의사당)과 만수대예술극장,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다다른 김일성경기장과 평양체육관에서는 당시 아리랑 축전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미국 클린턴 정부 시절 평양을 방문했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일갈이 생각났다. “북한은 수만 명의 군중이 단 1도의 각도도 흐트러지지 않고 일사천리로 동시에, 정말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이다.” 물안개 자욱한 평양의 아침 거리에는 작업복 차림의 남성들과 수수한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빨간 마후라 교복의 아이들과 아무렇게나 뒤엉켜 서로의 출근길과 등교길을 재촉했고, 그토록 타고 싶었던 평양 지하철에는 끝내 인연이 닿지 못했다.
2박 3일의 빡빡하고 짧은 일정이 다 소진될 때까지 우리 일행은 매일 밤 북한 기자, 관계자들과 술을 마셨다. 북한의 룡성맥주와 우리 쪽에서 가져간 스카치블루를 섞어 만든 일명 ‘남북화합주’는 북한의 상징, 털게 안주와 환상으로 어울리며 더할 나위 없는 흥취를 자아냈고 단번에 어색하지 않은 호형호제 어깨동무를 유발했다. 그 밤들을 지배했던 몽롱한 취기만 아니었다면 좀 더 조리있고 애잔하게 그 유난스러웠던 술자리들을 설명할 수 있으려만 지금은 다 똑같은 색깔로만 떠오른다. 다만, 새벽 한기에 눈을 떠 숙취에 깨질 듯 한 머리를 움켜잡고 창문 너머로 평양의 여명을 보면서 얼핏 그런 생각은 한 것 같다. 머지않아 우리가 같이 살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20년이 지났지만 북한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다. 새해 벽두부터 김정은은 남북을 동족이 아닌 ‘적대적 교전국 관계’로 재규정하고 헌법 개정 운운하고 있다. 물론 해를 넘긴 2개의 전쟁 설거지에 분주한 미국의 관심사에 한반도 문제가 끼어 있을 리 없다. 설사 미국이 아직은 앵글로색슨족 다음의 형제의 나라로 우리를 껴안고 있다 하더라도 도대체 언제까지 그들의 우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 핵무장의 당위(當爲)는 여기서 기인한다. 동아시아의 핵개발 도미노를 우려하는 미국의 극렬한 반대가 있더라도 이제는 냉철하게 국민적 논의를 진전시킬 때이다. 사실 아무 한 일도 없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현직 대통령의 대항마로 트럼프가 또 악다구니를 세우며 덤벼드는 광경은 미국의 국운도 쇠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아무리 막아도 북한 곳곳이 한국으로 물들어가는 체제 내의 위기감 때문이라도 김정은은 더욱 더 핵에 집착할 것이다. 아니, 기자가 김정은이라도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북한의 비핵화는 이제 불가능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 퍼주었을 때는 개시(開市)랍시고 협상테이블에 앉았을지 모르지만 그 뒤의 모든 협의는 무용지물이 됐고 합의는 폐기됐다. 이제 김정은은 ‘핵보유국’의 위치에서 오롯이 미국만 찾을 것이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은 지금까지처럼 북한이 그때그때 가지고 노는 꽃놀이패이며 들러리일 뿐이다. 이런 엄혹한 현실의 좌표도 우리의 핵무장을 부추기고 있다.
내재적 위기감에 좀 더 살을 붙여보면, 이는 김정은 체제가 외부로부터의 신호가 아닌 내부의 분열과 동요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년 전 평양에서 기자를 바라보는 평양 시민들의 눈길에는 호기심과 부러움 보다는 경계심과 자부심이 더 선명했다. 너희들이 뭔데 이 위대한 수령님의 땅을 짓밟고 다니느냐, 빨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지금은 총에 맞더라도 한국의 드라마를 찾아보고 탈북민 등을 통해 우리의 실상을 어느 정도는 감지하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의 입에서조차 남조선이 사라지고 공공연하게 대한민국이 언급되고 있지 않는가. 공식적으로 김정은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도 나름 호재이다. 김씨 왕조의 백두혈통에서야 여왕이면 어떠냐고 윽박지를 수 있겠지만 지질할 정도로 보수적인 북한의 군(軍)과 사회가 과연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우리의 핵무장과 북한의 붕괴 고민에 앞서 당장은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의 힘겨루기에 우리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가 관건이다. 사실 외교를 이념으로 하려는 것은 미친 짓이다. 가장 차가운 머리로 철저하게 국가적 실익만 도모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외교가 미국 때문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중국에게도 곁을 내줘야 한다. 그래서 신임 외교부 수장의 “중국과도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일성을 애써 곱씹고 있다. 문제는 용산이 바뀌어야 하는데 MB(이명박 전 대통령) 때도 한껏 말아먹었던 잔재들이 허구한 날 외눈박이 헛발질이나 일삼으며 김건희 여사와 가깝다는 얘기나 들리게 하니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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