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덕희'를 완성하는 픽션 찢고 나오는 라미란의 힘

조영준 2024. 1. 2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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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345] 영화 <시민덕희>

[조영준 기자]

 영화 <시민덕희> 스틸컷
ⓒ (주)쇼박스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덕희(라미란 분)가 은행 문을 열고 급하게 뛰어들어온다. 손진영 대리라는 사람으로부터 햇살론 대출을 추천받고 서류 준비 목적을 이유로 여러 차례 송금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단다. 총 3200만 원을 8차례에 걸쳐 보냈다는 그녀. 대출 수수료에 전산 처리 비용, 서류 작성비 등 그 명목도 가지각색이다.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의 상황에서 돈이 급하던 차에 손 대리라는 사람의 연락은 지푸라기와도 같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덕희가 돈을 보냈다던 지점의 손진영 대리는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던 인물이 아니고, 애초에 은행에서는 고객에게 송금 요청을 하지 않는다.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이다.

한편, 중국 칭다오의 보이스피싱 콜센터에서는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또 다른 한국인들을 속이고 있다. 그중 하나인 재민(공명 분)은 덕희를 상대로 작업을 했던 손 대리다. 총책과 그 일당에게 붙잡힌 채로 불법을 저질러야 했던 그에게도 사정은 있다.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달콤한 말에 속아 중국까지 건너왔지만 돌아온 것이라고는 가혹한 폭행과 감시, 그리고 신상 정보를 볼모로 한 보이스피싱 연락책 역할이다. 도망치다 붙잡힌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도 신고와 탈출에 대한 의지를 꺾어놓지만 그런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끊임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김덕희씨가 제일 빨랐어요. 내가 아는 거 다 말할게요. 그냥 신고만 해주세요."

02.
영화 <시민덕희>는 자신의 돈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과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신이 사기를 쳤던 피해자에게 다시 전화를 건 남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2016년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은 경기도 화성의 김성자씨가 자신을 상대로 보이스피싱 작업을 했던 사기꾼의 제보를 받아 총책을 검거했던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이 작품을 연출한 박영주 감독은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이 우리가 시민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멋있는 점이라고 밝히면서 김성자씨의 모습에서 그런 부분들을 찾을 수 있었기에 이야기의 모티브로 삼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는 보이스 피싱을 당한 여성이 조직 내부자의 제보를 받아 총책을 잡는 데 기여한다는 실화를 뼈대로 하고 있다. 보이스피싱의 콜센터와 총책 무리가 중국 칭다오에 거점을 두고 있다는 부분이나 그녀의 곁을 지키는 봉림(염혜란 분)과 애림(안은진 분), 숙자(장윤주 분)와 같은 인물은 작품의 완성도와 영화적 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다시 만들어낸 부분이다. 사기 당한 돈을 되찾기 위해 중국까지 건너간다는 설정은 덕희라는 인물의 무모하지만 강인한 캐릭터를 강조할 수 있게 만들고, 주변 인물들과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일종의 팀업(Team-up)적인 요소와 오락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영화 <시민덕희> 스틸컷
ⓒ (주)쇼박스
03.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두 이야기, 보이스피싱 콜센터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나아가는 덕희와 반대로 총책 일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재민을 교차하며 전개하는 방식이다. 신의 교차 방식을 활용했던 작품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는 의미적으로 조금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각자가 처한 막다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려 나가는 두 인물의 목적지가 결국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그 교차점은 보이스피싱을 당해왔던 지난 모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놓여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를 향해 나아가던 두 인물이 하나의 장면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도 현실의 모든 문제가 금방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를 비로소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오보다 더 대담한 용기와 결정이 필요한 법. 영화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덕희와 재민 두 사람의 어깨를 짓누른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두 사람을 돕지 않던, 유연하지 못하고 꼿꼿하기만 했던 경찰 집단의 경직된 태도도 한몫을 한다. (실제로 영화의 모티브가 된 김성자씨 역시 처음 경찰로부터 무시와 비웃음만 받았을 뿐,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04.
개인의 실화에 기대고 있으면서 보이스 피싱이라는 범죄를 단지 한 사람만의 이야기로 국한하지 않고 넓게 대하고자 하는 태도 역시 이 영화가 가진 의미적인 부분 중 하나다. 덕희가 자신이 아닌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증인을 구하는 장면이나 재민이 자신의 제보를 구체화하기 위해 빼돌린 증거 자료 속 수많은 피해자들의 이름은 우리 모두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까지 소재로 활용되며 희화화되는 시대에서 보이스 피싱 범죄란 늙고 힘없고, 덜떨어진 사람들만 사람들만 당한다는 다소 편협하고 부정적인 시선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이는 반대편에 놓여 있는 보이스피싱 콜센터의 수많은 범죄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화는 굳이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까지 넘어온 한국인들의 모습을 몇 차례가 보여준다. 그들 역시 달콤 살벌한 유혹에 속아 육체와 영혼을 모두 저당 잡힌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총책인 오명환(이무생 분)에 의해 칭다오의 콜센터가 정리될 때도 영문도 모른 채 제일 먼저 탑차에 실려 짐짝처럼 또 다른 콜센터로 옮겨지던 게 그들 아니었나. 관리자였던 일부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이쪽에서도 누구나 가해자를 강요받는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한다.
 
 영화 <시민덕희> 스틸컷
ⓒ (주)쇼박스
05.
무엇보다 이 영화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덕희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러닝타임 내내 빼곡하게 채워 넣는 라미란 배우다. 초반부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재민이 자신이 속해있는 보이스피싱 무리를 제보하겠다며 다시 연락해 온 때다. 운전 중이던 트럭을 갓길에 세우고 내려선 그녀는 도움은 주지 못할 망정 매뉴얼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112 센터 담당자의 멘트에 발을 동동거리며 답답한 마음을 온몸으로 쏟아낸다. 이 장면에서 같이 발을 구른 건 나 혼자만의 일이었을까. 박 형사를 처음 만나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쏟아내는 장면에서도, 두 아이 민지와 훈이로부터 강제 분리되던 때에 울음을 삼켜내던 모습에서도 그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을 공력을 기울인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화면을 가득 채우던 그녀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나아가던 그녀의 연기 앞에 어느 누가 마음을 빼앗길 수 있지 않을 수 있을까. 곁에 머물던 다른 인물들의 자리가 선명하고 또렷하게 남을 수 있는 것 역시 덕희라는 인물이 제대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작품에 하나의 잘 완성된 상업영화 이상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화 속 인물만큼이나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의 구현과 완성이 아닐까? 적어도 이 지점에서 그녀는 픽션을 찢고 나온다.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니 눈에선 피 눈물 나는 거야!"

06.
2016년 6월부터 8월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시민덕희>. 사실 이 작품은 코로나19의 여파로 촬영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개봉을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심지어 재민 역의 배우 공명은 군입대 전에 촬영을 하고, 제대 이후에야 작품의 개봉을 맞이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기도 했을 정도. 오랜 시간 관객들을 만나지 못하고 묵혔음에도 지금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가 가진 힘이 크다는 뜻이다. 지난 2019년 영화 <선희와 슬기>로 첫 장편작을 연출했던 박영주 감독. 그녀의 첫 장편 상업 영화인 <시민덕희>는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만하다. 취할 것은 취하고 도려내야 할 지점은 도려낼 줄 아는,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제 속도를 낼 줄 아는 영화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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