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바람'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양형석 기자]
지난 2016년 8월 영국방송협회 BBC에서는 전 세계 영화평론가 177명의 투표를 거쳐 '21세기의 위대한 영화' 100편을 선정했다(공동순위로 집계된 영화를 포함하면 실제로 선정된 영화는 총 102편이었다). 2001년에 개봉했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1위에 오른 가운데 <이터널 선샤인>(6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19위), < 월-E >(29위)처럼 대중들에게 익숙한 영화들도 제법 많이 포함돼 있다.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100대 영화 순위를 보면 과거보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30위, 고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66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선정 시기가 2016년이 아닌 2020년대에 이뤄졌다면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2020년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역시 상당히 높은 순위에 올랐을 것이다.
▲ <화양연화>는 BBC선정 21세기 최고영화 2위에 선정되는 등 왕가위 감독 영화 중에서도 최고로 기억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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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등장했던 애틋한 홍콩의 멜로영화
2000년대 들어 그 위상이 많이 꺾이긴 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 영화시장을 주름 잡았던 홍콩영화는 크게 오우삼 감독과 주윤발로 대표되는 누아르 영화와 고 이소룡과 성룡, 이연걸이 주도했던 쿵푸액션영화로 양분됐다. 여기에 주성치라는 걸출한 '희극지왕'이 코미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여러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홍콩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멜로 영화도 꾸준히 관객들을 만났다.
여성감독 정완정이 연출한 1987년작 <가을날의 동화>는 '영원한 따거' 주윤발의 멜로연기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약 10년 동안 짧게 활동하고 은퇴한 배우 종초홍의 대표작이기도 한 <가을날의 동화>는 엇갈리는 두 남녀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대서양이 보이는 바다에서 식당을 차린 선두척(주윤발 분)이 제니퍼(종초홍 분)와 재회하는 엔딩은 <가을날의 동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1987년 <가을날의 동화>를 연출했던 정완정 감독은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98년 '홍콩 4대천왕' 중 한 명인 여명과 대만출신 여성배우 서기를 캐스팅해 또 하나의 멜로영화 수작 <유리의 성>을 선보였다. <유리의 성>은 국내에서 홍콩영화의 침체기가 시작되는 시기에도 서울관객 12만 명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가수활동도 병행하던 여명이 직접 부른 OST 'Try to Remember'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7년에 제작돼 국내에서 1998년에 개봉했던 금성무(카네시노 타케시), 곽부성, 진혜림 주연의 <친니친니: 안나마덕련나>는 음악을 소재로 세 남녀의 삼각로맨스를 다룬 작품이다. 중반 이후 내용이 복잡해지면서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좋은 음악과 함께 긴 여운을 남긴 멜로영화였다. 특히 진혜림 버전의 감미로운 'A Lover's Concerto'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접속> OST 버전과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홍콩 연예계 최대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는 지난 2008년 옛 연인과의 동영상 및 사진 유출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장백지는 장만옥의 뒤를 잊는 청순가련 여성 배우였다. 특히 1999년에 출연했던 <성원>은 시각장애와 언어장애를 가진 남자주인공 양파(임현제 분)와 상냥한 간호사 초란(장백지 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그린 멜로영화다. <성원>으로 국내에서 인지도가 급상승한 장백지는 이후 한국영화 <파이란>에 캐스팅됐다.
▲ 중화권 최고의 연기파 배우였던 양조위는 <화양연화>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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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촬영기법과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1990년대 '아시아영화의 아이콘'으로 명성을 날린 왕가위 감독은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에 이어 1997년 <해피 투게더>를 통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관객들은 당연히 왕가위 감독의 차기작에 큰 기대를 가졌고 왕가위 감독은 2000년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 <아비정전>에 출연했던 양조위와 장만옥 주연의 신작 <화양연화>를 선보였다.
<화양연화>는 배우자가 있는 두 주인공 주모운(양조위 분)과 소려진(장만옥 분)이 자신들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맞바람을 피운다는 아침드라마에서 볼 법한 소재의 영화다. 하지만 왕가위 감독은 두 주인공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사랑에 대한 감정을 특유의 절제된 미장센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하며 관객들을 매혹 시켰다. <화양연화>는 평가가 야박하기로 유명한 이동진 평론가에게 별 5개를 받은 흔치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양조위는 홍콩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 홍콩에서 많은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고 연기에 대한 열정과 소탈하고 예의 바른 성품을 두루 갖춘 배우로 명성이 자자했다. 양조위는 1997년 <해피투게더>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3년 후 <화양연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정점을 찍었다. 이후 양조위는 오늘날까지 20년 넘게 중화권을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왕가위 감독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지만 적지 않은 영화팬들은 <화양연화>를 1990년에 개봉한 <아비정전>, 2004년에 개봉한 < 2046 >과 함께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왕가위 감독의 멜로 3부작'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실제로 세 작품에서 양조위는 주모운, 장만옥은 소려진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했고 세 영화의 시대적 배경 역시 <아비정전>이 1960년, <화양연화>가 1962년, < 2046 >이 1964년이다.
오랜 기간 촬영하고 편집하기로 유명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답게 <화양연화> 역시 워낙 많은 장면을 촬영하고 삭제한 영화로 유명하다. 삭제 장면만 따로 모아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해피투게더>처럼 <화양연화> 역시 삭제장면을 모두 포함하면 런닝타임이 3시간에 달했을 거라고 한다. 심지어 <화양연화>의 주인공 양조위조차 시사회에서 완성본을 보기 전까지 영화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 장만옥이 <화양연화>에서 보여준 우아한 분위기는 관객들을 매혹 시키기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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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 감독 중에서 왕가위 감독만큼 음악을 적절하고 멋지게 사용하는 감독도 드물다. <화양연화> 역시 음악이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 곳곳에 음악이 적절하게 사용됐다. 영화 제목 <화양연화>는 1930~1940년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가수 저우쉬안의 동명곡에서 따왔다. '꽃 같던 시절의 빛'이라는 뜻의 <화양연화>는 두 주인공이 보낸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의미한다.
영화의 메인테마곡인 'Yumeji's Theme'는 1991년에 개봉한 일본영화 < Yumeji >의 주제곡을 재사용한 것이다. 왕가위 감독은 본인의 영화에 알맞다고 판단하면 이미 발표된 노래나 다른 영화의 OST도 과감하게 사용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중경삼림>에 쓰였던 'California Dreamin''이나 2013년작 <일대종사>에서 엔리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의 OST '데보라 테마'를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주모운과 소려진이 바람을 피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던 두 사람의 배우자는 영화 내내 한 번도 얼굴이 나오지 않고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얼마나 잘난 사람이기에 양조위와 장만옥 같은 남편과 아내를 두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는지 궁금해하는 관객들이 많았지만 왕가위 감독은 끝까지 이들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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