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옥살이 잊혀진 독립지사 정이형

김삼웅 2024. 1. 2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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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69] 정이형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정의부 중대장 정이형 선생은 평안북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항일무장투쟁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19년에 이르는 최장기수로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 이규창이 정이형 선생의 맏사위로 이회영과는 사돈 간이다.
ⓒ 국가보훈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관련 국내외에서 최장기 복역한 독립지사는 누구일까? 국내에서는 19년을 기록한 정이형(鄭伊衡, 1897~1956)이고, 해외에서는 일왕 폭살을 기도하다 투옥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이다. 그는 22년 2개월 동안 혹독한 일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일제의 패망으로 풀려났다.

젊어서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과 독립운동 단체의 연대, 해방 후에는 민족통일운동과 친일파 척결에 앞장섰던 정이형은 일반에게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정이형은 1897년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에서 지역의 재력가인 아버지 정효기와 재혼한 어머니 수원 백씨 사이에 태어났다. 호적 이름은 원흠(元欽)이고 이명은 용현(用賢)이다. 호는 쌍공(雙空),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다소 허무주의적인 아호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니힐리스트가 아닌 치열한 행동주의를 보여준 투사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이복 형 정원익과 외가 쪽 선비인 민족주의자 김평묵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1년 계심사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5살에 민족운동단체 서북학회 회원으로 자금지원을 하던 형을 따라 회원으로 들어가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10년 울산 김씨와 결혼하여 아들 정문하와 딸 정문희를 두었다. 이즈음 형의 권고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양을 했다.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접선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될까 우려한 형의 배려였던 것 같다.

정이형은 금강산에서 운허스님과 만나 불법을 배우고, 전남 장성군 출신 김계순과 서상면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1918년 가을 가족과 함께 전북 정읍으로 이사하였다. 석달 만에 부인이 풍토병으로 눈을 감으면서 그는 다시 전남 장성으로 옮겼다.

1919년 장성에서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정이형은 갓 이사 온 형편이지만, 민족의식이 충만하여 지역 청년들과 쉽게 뜻을 같이 하고, 이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에 나섰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 강항의 후예 강탄탄과 재혼하였다.

장성에서 터를 잡은 정이형은 의주에 살고 있는 형이 보내준 자금으로 선룡사립보통학교 등을 세워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반일적인 교육 내용이 알려지면서 경찰의 수배를 받고 검속되었다가 풀려날 무렵 형이 사망하여 1922년 10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형의 장례를 치른 후 만주로 떠났다. 소시적부터 꿈꾸웠던 항일투쟁을 하기 위한 망명이었다. 신팔균·권덕원 등 고향에서 사회 활동을 함께 했던 이들이 소속한 무장항일단체 통의부에 들어갔다. 통의부는 얼마 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서로군정서·한족회·대한독립단 등과 통합, 대한통의부로 개칭하면서 1920년대 초 항일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정이형은 대한통의부 제5중대장으로 1924년 3월 13일 대원 6명과 일제의 여해 파출소를 습격, 일경 여러 명을 사살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에는 통의부의 개편 단체인 정의부의 부관 겸 제1, 7 중대장으로 부하 30여 명과 국경지대 여산경찰서 출장소 등을 습격, 일경 15명을 사살했다. 그는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투쟁의 선두에 섰다.

1926년 4월 5일 비밀결사체인 고려혁명당 결성 주도를 통해 정이형은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한 전사로 성장했다.

고려혁명당은 형평사의 이동구·송현, 천도교 혁신파의 김봉국·현정경, 정의부의 양기택·오동진, 러시아의 한일독립운동가 등 좌우세력이 그의 주도로 결집해 결성한 단체이다.(김도형, <정이형, 식민지 백성 되기를 거부한다>, <발굴 한국현대사인물②>)

그의 항일전은 무장투쟁과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 등 정치투쟁을 병행하였다. 일제는 그의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1927년 3월 11일 길림성 북극문 부근에서 추전양행이란 위장 간판을 걸고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중 하얼빈 영사관 일제 경찰에게 동지 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국내로 압송되고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정이형은 공판정에서도 당당하게 대응했다. 재판부에 경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제1회 공판에선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라고 밝힌 후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였다.

1929년 3월 19일 제4회 공판에서 사형구형을 받고, 4월 20일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평양·서대문·마포·대전형무소 등을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45년 8월 17일 공주형무소에서 출감하였다. 무려 18년 5개월 17일간이고, 구속기간까지 합치면 19년 동안의 야만적인 일제의 감옥생활이었다.

민족해방을 맞아 8.15출옥혁명동지회대표,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회위원, 민주주의독립전선 상무위원 등 우사 김규식과 정치노선을 함께하고 남북협상에도 참여하였다. 미군정이 주도한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에 선임되고, 1946년 제6차 회의에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 조사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할 것을 제안, 동의를 얻어 특별법 제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1월 11일 정이형을 위원장으로 하는 친일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이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 상정되는 시점에 미군정에 똬리를 튼 친일경찰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결국 친일파 처단 특별법안은 수정·재수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헌 누더기가 되고, 그나마 입법의원을 통과했으나 공포를 민준을 보류함으로써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특별법 기초위원장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법안이 누더기가 되고 결국 미군정에 의해 공포가 거부당하는 기막힌 조국의 정치 현실을 지켜보면서, 그는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가 구성되면 친일파 처단 특별법을 제정하고자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마포 을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여 이 꿈마저 접고 정계 일선에서 물러났다. 빈곤한 노후를 보내던 그는 1956년 12월 15일 심장병으로 파란많은 생을 접었다.

그가 만주벌판에서, 19년의 영어 생활속에서, 그리고 혼란과 무질서의 해방공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켰던 그의 정치적 신념이 하루 빨리 현실로 이루어지길 간곡히 기대해본다.(박환, <잊혀진 혁명가 정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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