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오징어, 세피아 네로, 오적어묵계
신년 모임을 서울 신문로의 유명한 갤러리 레스토랑에서 가졌다. 8명이 참석한 이 모임에서 식사의 중반까지는 예술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아무래도 식사 전에 갤러리 큐레이터로부터 ‘수수덤덤 전(展)’ 한국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화제가 어쩌다 코로나 시절로 흘러갔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은 확진자를 중범죄인 취급하던 초반에 코로나에 걸렸다고 했다. 시간 단위로 동선까지 샅샅이 까발리던 그 시절에 말이다. 그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서러운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놓았으나 참석자들은 박장대소했다. 나 역시 오징어먹물 리소토를 먹으면서 배꼽이 아프게 웃었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코로나가 한창 창궐할 시점인 2020년 봄으로 돌아가 보자. 언론에서는 연일 인류의 전염병 투쟁사(史)를 특집기사로 쏟아냈다.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가 느닷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이때 가장 자주 언급된 도시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는 1456~1528년 흑사병이 모두 14번 휩쓸고 지나갔다. 베네치아가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누구나 아는 대로다. 동양 문물과 지중해 해량문물이 유럽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베네치아 아닌가. 병균은 사람과 물자를 따라다닌다. 베네치아에서는 오가는 사람과 물자가 많다 보니 툭하면 전염병이 돌았다.
외국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내리면 첫 번째 통과해야 하는 문이 쿼런틴(Quarantine)이다. 이 앞에는 소독약을 뿌린 매트를 깔아놓았다. 혹여나 여행객의 신발 밑창에 묻었을지도 모를 병균을 살균하겠다는 뜻이다. 방역이라는 뜻의 ‘쿼런틴’이 바로 베네치아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이 매트를 힘주어 밟으면 물기가 살짝 올라온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워낙 자주 흑사병이 창궐하다 보니 나름의 생존방식을 체득했다. ‘쿼런틴’은 흑사병이 돌면 무조건 40일간 철저하게 방역한다는 뜻이다.
반복되는 흑사병 창궐은 베네치아인의 일상에 여러 가지 문화를 문신처럼 새겨놓았다. 먼저 부케테(buchette). 와인 구멍이다. 전염병이 돌아도 삶은 계속된다. 와인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와인을 사서 마셔야 한다. 손님과의 대면을 피하고 와인을 팔려면? 방법은 건물 외벽에 20㎝x 30㎝의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이곳을 통해 와인을 파는 것이다. 그게 부케테다.
베네치아에서 유명한 스파게티가 ‘세피아 네로 스파게티(Spagetti al Nero di Seppia)'다. ‘세피아 네로’는 이탈리아어로 ‘오징어 먹물’이라는 뜻이다. ‘세피아 네로’는 베네치아인에게 전염병 예방약으로 두루 쓰였다. ‘세피아 네로’를 이용한 리소토도 있다. 실제로 오징어먹물에는 타우린이 들어 있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파게티와 리소토 뿐만아니라 김밥에도 오징어먹물이 사용된다.
베네치아 카니발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베네치아 카니발에도 흑사병의 흔적이 남아있다. 흑사병 의사, 즉 메디코 델라 페스테(Medico della peste)라고 불리는 새 부리 마스크다. 흑사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방독면처럼 쓰고 다닌 마스크가 새 부리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 ‘메디코 델라 페스테’는 국내에서도 핼러윈 데이의 인기 복장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조선 시대에는 오징어를 오적어(烏賊魚)로 불렀다. 왜 해물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를 넣었을까. 얼핏 생각하기에 오징어가 포식자에게 위협을 받을 때 뿜어내는 검은색 먹물이 까마귀 색을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의 형 자산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 시절 정약전이 집필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 백과사전이 ‘자산어보(玆山魚譜)’다. 이준익 감독이 같은 이름의 영화로도 만들었다. ‘자산어보’에는 오적어 어원에 관한 한 가지 설(說)을 적어놓았다.
오징어가 까마귀를 즐겨 먹는 특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오징어는 바닷물 위로 떠 올라 죽을 체를 하고 있으면 까마귀가 오징어를 먹으려 달려든다. 그때를 기다려 오징어가 다리로 까마귀를 휘감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전혀 사실무근이지만 조선 시대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오징어의 먹물에서 나온 말이 오적어 묵계(烏賊魚 默契)다. 신뢰할 수 없는 약속을 일컫는 말이다. 오징어 먹물을 먹처럼 사용해 글씨를 쓰기도 한다. 처음엔 먹을 갈아 만든 먹물과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징어 먹물은 증발해 사라진다. 아무리 중요한 약속을 한들 약조가 문서로 남아있질 않으니 구속력이 사라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도 오적어 묵계가 언급된다. ‘오징어 먹물로 쓴 글씨는 해를 넘기면 먹이 없어지고 빈 종이가 된다. 사람을 간사하게 속이는 자는 이것을 써서 속인다.’
2년 전 여름. 서울 부암동의 유금와당박물관에 지니어스 테이블 회원들과 초대받은 적이 있다. 유금와당박물관은 유창종 전 대검 마약과장과 금기숙 전 홍익대 교수의 성(姓)을 따서 지은 박물관이다. 유 관장은 평검사 때부터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기와에 매료되어 기와를 수집·연구하다 국내 최고의 와당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가 수집한 와당은 용산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부부는 우리를 집 근처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자하문로가 내려다보이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식당이었다. 메뉴판을 보며 식사를 주문하는 데 나는 별 생각 없이 오징어 먹물 파스타를 골랐다. 나는 처음 가보는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이날은 왠일인지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끌렸다.
아무래도 식사 중 화제는 와당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지하면서도 재밌고 유쾌한 대화가 진행되었다. 대화에 너무 몰입했기 때문일까. 그만 실수로 파스타면 몇 가닥을 흘리고 말았다. 하얀색 셔츠 앞부분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대화가 얼어붙었다. 일행들의 시선에 와이셔츠 먹물로 모아졌다. 난감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임시방편으로 냅킨에 물을 묻혀 먹물을 닦아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더 요란을 떨다가는 식사 분위기를 깰 거 같아서 태연한 척했다.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한 40여분이 지났을까. 무심결에 셔츠를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먹물이 거의 사라져 자국이 희미해졌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른 일행들도 놀라워했다. 누가 정색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한 먹물로 새카맣던 자국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먹물이 사라지다니!
그때 다섯 글자가 뇌리를 스쳤다. 언젠가 신문을 읽다 수첩에 메모한 글귀. 오적어묵계. 아, 이래서 오적어묵계라는 말이 나온 거구나.
“옛말에 오적어묵계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러네요.”
나는 웃으며 오적어묵계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일행들은 내 셔츠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일을 눈으로 보면서 오적어묵계를 실감했다.
나는 오징어로 만든 것은 다 좋아한다. 가장 즐기는 것은 데친 오징어를 초장에 찍어 밥반찬으로 먹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오징어무국을 즐겨 먹었다. 그 흔하던 오징어가 금값이다. 그렇지만 겨울이 가기 전 오징어무국을 먹어봐야겠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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