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왜곡 논란에 빠지다 [하재근의 이슈분석]
많은 칭송을 받았던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위기에 빠졌다. 누리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심지어 ‘역사 왜곡 막장 전개, 이게 대하사극이냐? 원작 핑계로 여론을 호도하지 마라’라는 문구가 담긴 트럭 시위까지 나타났다.
논란의 출발점은 원작이라는 ‘고려거란전기’를 쓴 길승수 작가의 문제제기였다. 대본 작가가 이정우 작가로 교체된 이후 전투신 이외엔 자신의 자문을 받지 않은 채 대본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드라마 기획 당시 길 작가의 책 원고를 제공한 후 시놉시스 작성이 이루어졌는데 KBS에서 길 작가 책이 원작이 아니라고 발뺌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드라마가 원작과 다른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고 자신의 자문도 받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 큰 파문이 일자 '고려거란전쟁‘ PD는 길 작가의 책이 이 드라마의 원작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길 작가의 ’고려거란전기‘에서는 전투 장면의 묘사만을 참고했다고 했다. 길 작가와 원작 및 자문계약을 맺은 건 맞지만 리메이크 형태가 아닌 일부분 활용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정우 작가가 대본을 집필한 이후엔 길 작가가 ‘스토리텔링의 방향성이 다르다’며 자문을 거절했고, 그 이후엔 다른 전문가의 자문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정우 작가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길숭수 작가의 소설 ‘고려거란전기’와 다른 독자적인 기획으로, 자신이 이 작품의 대본 작가가 된 후 ‘고려거란전기’와 상관없이 별도로 이야기를 설계했다고 했다. 둘은 일부 전투 장면 이외엔 아예 다른 작품이기 때문에 원작 논란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러자 길승수 작가는, 길 작가가 자문을 거절했다는 ‘고려거란전쟁’ PD의 해명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이정우 작가가 관직명 등을 적은 페이퍼 작성을 요구하길래 그건 자문의 업무가 아니라며 거절했더니, PD가 안 할 거면 더 나올 필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길 작가는 자문을 계속 하겠다고 했지만 PD가 다른 자문을 구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상의 이야기를 보면 길 작가의 작품이 원작이 아니라는 제작진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길 작가 스스로도 드라마가 자신의 작품과 다른 내용이라고 했고, 제작진이 자신의 자문을 받지 않는다고 했으니 원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다만 애초에 계약을 어떻게 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제3자가 단정내리긴 힘들다. 또, 길 작가는 제작진이 먼저 자신의 자문 받기를 거절했다고 하고 PD는 길 작가가 먼저 거절했다고 했는데, 길 작가는 페이퍼 작성을 거부했을 뿐이라고 여기지만 제작진은 그게 자문 거절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어서 양측의 말이 동시에 맞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건 앞에서 말했듯이 계약서를 봐야 하는 문제여서 어차피 제3자가 판단 내리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일반인에겐 양측의 원작 계약 이슈보다 드라마 내용의 역사 표현 문제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원작이 어떻게 됐건 그런 것보다 최종적으로 드라마가 올바르게 표현됐느냐가 대중에겐 더 핵심적인 이슈인 것이다.
바로 그 역사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트럭시위까지 벌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다. 거란의 2차 침입이 마무리된 후 고려는 국가체제를 정비해 다음 침입에 대비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 대한 사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작가가 최대한 드라마틱하게 현종이 국가를 개혁하고 국력을 모아가는 과정을 극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 나이 어린 현종이 성군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와,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는 이야기도 담았다.
이걸 극적으로 표현하다보니 개혁하는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이 거세게 저항하고, 부인을 새로 들이는 과정에서 기존 부인이 거세게 저항하고, 현종이 크게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초기에 좀 모자란 설정으로 묘사된 것 같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선 현종의 국가 체제 정비 당시에 호족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기존 부인의 저항 여부에 대해선 알기 힘들고, 현종이 거란 2차 침입 이후에 그렇게 모자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센 반발이 나오고 있는데, 중요한 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라는 점이다. 어느 정도의 상상과 극화는 허용될 수 있고, 진짜 역사는 역사책으로 공부해야 한다. 물론 ‘고려거란전쟁’에 등장한 상상이 ‘굳이 저렇게 해야 했을까’ 싶을 정도로 선을 넘나든 측면이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작품 매도까지 하는 건 과도해 보인다.
아쉬운 건 이야기를 극적으로 꾸미는 그 열정으로 거란 2차 침입 때의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그렸으면 좋았을 거란 점이다. 어차피 한정된 분량인데 호족 비밀 모임, 황후의 질투, 강감찬 좌천과 현종의 낙마 같은 상상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보다 양규가 흥화진을 요새화하고 민심과 군심을 모아간 과정, 양규 결사대의 결기, 양규 부대와 합류하기 전 김숙흥의 싸움 등에 더 에너지를 쏟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2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인들이 합심해 어떤 점들을 고심하며 거란 재침에 대비했는지, 그 속에서의 헌신과 노고, 나라를 중흥시키려는 열정이 뿜어내는 역동성 등에 초점을 맞춰 지금보다 좀 더 담백하게 그렸어도 좋았을 것이다.
어쨌든 시위까지 벌어지는 건 과도해보이고, 부디 앞으로라도 이 작품이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고 거란 3차 침입에 맞서는 고려인의 기상을 제대로 그려 국민에게 다시 한번 감동을 전해주길 바란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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