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할 뻔했는데 “정신질환 참작”… 염산테러 절반이 집유
피해 심각한데 형량 너무 낮아
“화학물질도 살인 흉기에 포함
특수상해로 최고 형량 내려야”
#지난달 한 20대 남성이 영국 국적의 여성 유학생 얼굴에 휘발성 물질을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 앞서 이 여학생은 해당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며 경찰에 신고했지만 사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전남 신안에서 70대 남성이 지난해 10월 평소 알고 지내던 50대 부부를 향해 염산을 뿌렸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평소 피해 부부에게 원한이 있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이처럼 화학물질을 피해자의 신체에 뿌려 화상을 입히는 범죄를 ‘화상 테러’로 부른다. 비교적 범행 수법이 단순해 일상에서 빈번히 발생하지만 피해 정도는 매우 심각하다. 주로 얼굴을 공격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실명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에 법조계에선 화상 테러의 피해 수준에 비해 형량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화상 테러는 피해자에게 회복할 수 없는 신체적 장애를 갖게 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므로 권고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6일 국민일보가 2017~2023년 피해자에게 염산을 뿌려 신체에 화상을 입힌 혐의로 확정판결을 받은 10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의 평균형량은 1년6개월로 집계됐다. 판결 10건 중 4건은 집행유예가 내려졌다.
염산 테러 대부분은 연인과 헤어지거나 상대 이성을 짝사랑할 때 발생했다. 오랜 기간 교제하던 남성에게 이별을 고했다가 화상 테러를 당한 A씨가 대표적 사례다.
A씨는 2020년 전 연인 B씨에게 8개월 동안 스토킹을 당했다. B씨는 같은 해 6월 A씨의 거주지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아파트에 찾아가 “평생 숨어 살아라”고 외치며 염산이 담긴 물병 두 개를 얼굴에 뿌렸다. A씨는 얼굴을 비롯해 신체 곳곳에 화상을 입었다. 법원은 B씨가 동종범죄나 폭력범행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없고, 피해자의 상해 정도가 중하지 않다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의도적으로 피해자의 눈을 겨냥했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상황이 참작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건도 있다. 광주 북구 소재 한 병원의 내원 환자였던 C씨는 자신을 진료했던 의사 D씨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광주북부경찰서와 광주지방검찰청에서 D씨에 대해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 C씨는 이에 앙심을 품고 염산 테러를 계획했다.
C씨는 그 이듬해 5월 D씨 진료실에 들어가 염산을 뿌렸다. D씨는 이 사건으로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각막혼탁 등의 상해를 입었다. 또 피하는 과정에서 견관절 타박상도 입었다. 법원은 C씨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사건 직후 정신병원에 입원해 한 달 넘게 치료받은 사실을 감안했다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화상 테러는 일반상해 또는 특수상해에 해당한다. 법원은 통상 일반상해와 특수상해에 대해 각각 징역 4개월~1년6개월, 6개월~2년가량의 형량을 선고한다. 전문가들은 평생 화상 흉터를 안고 가야 하는 후유증과 트라우마를 고려하면 가해자에 대한 형량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화상 테러 대부분은 우발적 범죄가 아닌 계획적 범죄이므로 범행 의도가 형량에 적극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태룡 변호사는 “특수상해는 양형기준표와 별개로 최대 10년까지도 형량을 선고할 수 있지만 판사들은 이 수준까지 선고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울분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명백한 의도로 범행을 계획하므로 특수상해로 선고할 수 있는 최고형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상해죄의 경우 합의가 이뤄지면 형량이 크게 낮아져 피고인이 이를 악용하기도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처벌불원서를 작성하는 일도 많다.
반면 보수적인 법원 특성상 특정 사건에 파격적인 형량을 선고하는 게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김응철 변호사는 “선고형에 담당판사의 재량이 적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법원에서 그동안 선고해 온 판례의 정도와 기준이 있다”며 “화상 테러도 그동안의 판례에 근거해 징역을 선고했을 텐데 앞서 1~2년형을 선고하던 범행에 급작스럽게 10년형을 선고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염산 등 화학물질이 협박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에 화상 테러가 실제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화학물질로 협박한 경우 일상 속 범죄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염산 등 화학물질을 도구로 협박 혐의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례는 최근 5년간 약 113건에 달한다.
이윤호 동국대 명예교수는 “화상 테러는 직접적인 피해도 심각하지만 국민 전체가 ‘나도 언젠가는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범죄라는 점에서 더 악질”이라며 “이제는 칼과 총뿐만 아니라 화학물질도 살인 흉기가 된다. 법원이 전통적인 범죄 수법에 매몰돼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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