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정현권의 감성골프]
전남 나주 혁신도시에 소재한 아파트 이름이다. 순수 우리말(빛가람)+한글 표기 한자(대방)+한글 표기 영어(엘리움로열카운티)로 복잡하게 만들어진 아파트명이다.
한숨에 읽어나가기 벅차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전화로 불러줄 때 제대로 알아듣거나 적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언젠가부터 아파트 이름이 모두 이런 식이다. 서류에 주소를 표기하려면 공간이 모자란다. 래미안퍼스티지(삼성), 힐스테이트(현대), 아크로리버파크(대림), 자이(GS), 푸르지오써밋(대우) 등 대형 건설사가 지은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원래 한글이었는데 재건축이나 재개발하면서 고급스러게 보이려고 외래어로 표기했다고 한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백조 등 아름다운 우리말 아파트명이 모두 밀려났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얼마전 국어문화원에서 19세 이상 내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아파트명 선호도를 조사했는데 한글 49.1%, 영어∙외국어 5%로 나타났다.
아파트명을 외래어로 해야 잘 팔린다는 통념과는 달리 우리말 선호도가 높았다. 긴 외래명은 두 글자나 세 글자로 줄여서 부르기에 차별화와 고급화라는 취지가 무색했다.
요즘에는 지역+건설사명+브랜드명에다 에튜, 파크, 포레스트, 레이크,리버, 에코 같은 애칭(펫네임)까지 끝에 붙인다. 건설사 컨소시엄 아파트명엔 더 긴 이름이 붙는다.
급기야 서울시는 지난해말 아름답고 부르기 쉬운 공동주택 명칭 동참 선언문을 만들었다. 강제성 없는 권고사항이어서 개선될지 의문이다. 인천햇님아파트, 반포미리내아파트, 빛고을햇살아파트 등으로 작명하면 얼마나 정겨운가.
아파트 못지않은 곳이 골프장이다. 초보 때 용인 레이크사이드와 레이크힐스를 헷갈려 엉뚱한 곳에 가서 프런트 직원과 실랑이를 벌인 적 있다.
동서울, 서서울, 뉴서울, 남서울 같은 골프장도 자칫 착각하기에 꼭 문자로 남겨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그래도 예전엔 지명이 앞에 붙어있어 비교적 식별하기 쉬웠다.
춘천CC, 홍천CC, 진주CC, 관악CC 등 대부분 골프장 이름에 지명이 붙었다. 이후 건설회사에 인수되거나 신생 골프장은 아파트처럼 대부분 영어명으로 바뀌었다. 고급 이미지를 풍겨 분양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소노펠리체, 파인밸리, 샌드파인, 마이다스, 카스카디아, 뉴스프링빌, 웰링턴, 트리니티, 노스팜, 코로, 페럼 등을 들으면 머리가 어지럽다. 감기약 이름 같다. 이러다 보니 몇 번씩 골프장 이름과 위치를 확인하는가 하면 정작 골프장명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명문 안양CC만 해도 안양베네스트라는 외래명을 붙여 바꾸었다. 베스트(Best)와 네스트(Nest) 합성어로 ‘최상의 보금자리’를 뜻한다. 깔끔하고 심플한 원래 이름이 괜찮았는데 괜히 다른 골프장들도 베네스트라는 이름을 붙여 모방한다.
한글을 사용하는 골프장에 더 정감이 간다. 경기도 여주 소재 아리지CC가 대표적이다. 27홀 대중골프장으로 도화엔지니어링이 만들었다.
2007년 개장 당시 캐디들에게서 한글 이름을 공모했다고 한다. 순 한글로 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아름다운 땅’이란 뜻으로 아리지가 채택됐다.
코스명도 햇님, 달님, 별님 3개를 한글로 했다. 친근한 이미지에다 그린피와 식음료 가격도 합리적이어서 골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
남여주CC도 지명을 붙여 알기 쉽도록 했고 코스에는 누리(세상), 가람(강), 마루(꼭대기) 등 한글 이름을 사용했다. 해가 비치는 …해비치…, 솔나무가 많아 …솔모로… 같은 이름은 그래도 한글을 풀어서 사용했기에 애교스럽다. 남쪽 마을 …남촌…, 동쪽 마을 …동촌, …아름다운 골프장…, 성문 안에 있다고 해서 …성문안… 같은 이름도 정겹다.
동쪽 끝 정동진처럼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골프장임을 바로 알 수 있는 좋은 이름을 두고 왜 바꿨는지 모르겠다. 세종CC는 미송-이글-엑스포-프레이충남-IMG내셔널-에머슨내셔날에서 세종에머슨으로 일곱 차례나 이름이 바뀌었다. 첫 번째 빼고 모두 외래명이다.
한국골프장경영협회에서 300여 골프장명을 조사한 결과 62개 골프장 이외에는 외래어이다. 우리말 골프장 30%, 외래어 70% 정도이다.
“장차 한자를 모르면 성현의 학문을 익히지 못해 백성이 상스러워지고 새로운 것(한글)만 찾으면 망하는 지름길이다. 형벌 문서를 한글로 하면 백성의 억울함이 덜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문자를 안다고 해서 억울한 일이 안 생긴다는 법이 없다. ”(최만리 상소문)
“삼강행실도 같은 것을 백성들이 한글로 쉽게 배워 좀더 바르게 살아가길 내가 소망했는데 너희는 삼강행실도를 익혔다고 사람이 달라지겠느냐고 따져묻는다. 글자 모르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설총은 이두를 만들었는데 설총은 되고 나는 왜 안되느냐.”(세종대왕)
전국 방방곡곡 아파트와 골프장에 어지럽게 외래명이 붙은 것을 알면 늘그막에 눈까지 침침해가면서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한 신하들 고집까지 꺾은 세종대왕에게 얼굴조차 들기 부끄럽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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