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일 걸린 '세기의 재판 지연'…판사도 판결 요지 4시간 읽다 지쳐

문현경, 황수빈 2024. 1. 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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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판부의 조건부 보석으로 풀려난지 하루만인 2019년 7월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심에서 전부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제징용사건 재판거래 의혹을 포함해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법원이 5년 만에 죄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부장 이종민·임정택·민소영)는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에게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2019년 2월 기소 후 박남천 부장판사와 심판·이원식 판사가 심리해 왔으나 2021년 2월 인사이동 후 지금의 부장판사들이 맡았다.

이날 선고에는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 소요됐다. 이종민 부장판사는 판결이유 요지를 읽기에 앞서 “오늘 일과 시간 중 선고가 마쳐질 지 미지수”라고 했다. 상당한 분량의 판결문을 들고 오는 재판부를 보며 방청석에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숨소리가 새어나오기도 했다.

기소 당시 검찰 공소장은 300페이지가 넘을 만큼 혐의가 방대했으나, 어느 것도 유죄가 인정되지 않았다. 검찰은 양승태 사법부가 청와대의 의도에 따라 강제징용 사건 재판을 지연시켜 상고법원 도입 등 숙원사업을 대가로 얻으려 했다는 재판거래 의혹 등과 관련한 정황이 고스란히 법원 내부 보고서로 남아 있다고 주장해 왔다. 검찰은 이를 47개 혐의로 구체화했다.


‘재판거래’ 의혹 일축…“강제징용 사건 재판개입 의도 없어”


김영옥 기자
‘재판거래 의혹’의 핵심은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을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외교부가 원하는 대로 대법원 소부 사건의 결론을 바꾸려하거나 전원합의체 재판을 지연시켰단 의혹이다. 그러나 이날 재판부는 재판 개입 의도부터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판사가 외교부 입장 대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 관련 내부 보고서를 작성하고 관련 부서에 전달한 것에 대해 “외교부와의 관계 등 사법부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검토하게 한 것이고, 재판 개입 의도였다기보다 이전 판결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가능성을 검토하던 연구관실에 참고로 준 것”이라 판단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당시 일본 기업측을 대리했던 김앤장 변호사를 직접 만난 것을 두고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해당 변호사에게 전원합의체에 회부한다는 계획을 알려줬고, 이는 공무상 비밀누설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도 “전원합의체 회부 계획은 양 전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재판장 지위에서 얻은 직무상 비밀이 아니며, 내심에서 자연스레 갖게 된 추상적 의견일 뿐”이라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사건 주심 대법관에게 “이전 판결을 번복하도록 결론을 설정해 줬다”고 검찰이 주장한 부분도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 재판장 지위도 가지고 있지만 소부 사건에 관여할 권한은 없다”며 애초에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또 “설령 그런 직무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이 한 말 정도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했다.


대법 논리대로 “재판개입은 직권남용 아냐” 판단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죄)란 공무원이 ①직권을 ②남용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③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④권리행사를 방해해야 한다. 이런 법리를 토대로 재판부가 ‘재판개입이 맞다’면서도, 양 전 회장에겐 애초에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었기 때문에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한 혐의도 있다.

일선 법원에서 헌법재판소에 한정위헌 취지로 위헌제청 결정을 하자,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해당 재판부에 이를 취소하고 재결정하라고 한 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검찰은 헌재와의 위상 싸움을 하던 대법원이 일선 판사의 판단을 찍어 누른 건 직권남용이라 봤지만, 재판부는 “양 전 원장에겐 재판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권한이 없다”는 논리로 해당 혐의를 무죄로 선고했다.

직권남용죄에 대한 이날 재판부의 판단은 2022년 대법원의 판단과 동일하다. 대법원은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사건에서 “부적절한 재판관여를 했지만, 애초에 재판에 관여할 직무권한이란 건 없고 월권행위에는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확정한 바 있다.

재판부는 양 전 원장과 두 대법관에 대해 적용된 다른 혐의에 대해서도 ①애초에 그럴 수 있는 직권이 없었다고 보거나 ②필요한 것을 시켰기 때문에 남용이 아니라거나 ③위법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의무 없는 일이 아니라거나 ④법원행정처의 메시지 전달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행사방해가 아니라고 판단해 무죄로 선언했다. 가령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결정 이후 통진당 소속 지방의회 의원들의 의원직 유지여부를 따지는 사건을 맡은 판사에게 행정처가 특정한 입장을 문건이나 말로 전달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판사들이 이를 신경쓰지 않고 각자 판단대로 했기 때문에 재판권 행사를 방해한 건 아니다’는 취지로 무죄로 판단했다.


하급자 직권남용 인정 있었지만…“대법원장 공모 없어”


양 전 대법원장의 하급자에게 직권남용을 인정하면서도, 양 전 대법원장이 여기에 공모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무죄로 한 혐의도 있다.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이 직권을 남용해 진보 법관들의 모임을 와해할 방안을 검토하도록 부하 직원인 심의관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했다고 보면서도, 재판부는 이는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했다. 헌법재판소로 파견 간 법관을 이용해 헌재 내부 정보를 빼낸 것도 이규진 전 상임위원이 벌인 직권남용으로 보면서도 양 전 대법원장이 지시한 적이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사법행정권남용 수사의 단초가 된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 사건도 비슷한 논리로 무죄로 결론났다. 진보 성향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모임에 사람이 늘어나자 법원행정처는 연구회를 둘 이상 가입하면 안 된다고 공지해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세력 확대를 축소하려한 적이 있었다. 재판부는 이런 부당 조치에 대해서도 양 전 대법원장이 지시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중복가입 해소조치가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였다면 (이를 실행하려 한) 임 전 차장이 (조치를 주저하고 망설이던) 고영한 전 처장에게 이를 근거로 설득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추론 근거로 제시했다.

이날 선고는 2시에 시작했으나 6시 27분에 끝났다. 중간에 한 차례 휴정해야 할 만큼 읽을 양이 많았다. 이날 선고로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14명의 판사 중 11명이 무죄를 선고받은 셈이다. 임종헌 전 차장에 대한 1심 선고는 다음달 5일 다른 재판부에서 내린다. 검찰은 이날 “1심 판결의 사실인정과 법리판단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만 입장을 밝혔다.

김영옥 기자

문현경·윤지원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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