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타그램]사진을 찍지 않은 사소한 이유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커피숍 3층 창가 자리를 좋아해서 한동안 자주 갔다. 뜨거운 커피 한 잔 사놓고 앉아 멍하니 사람과 차와 자전거와 날짐승 들이 오가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으로 내려다본 거리는 계절마다 시간마다 다른 그림들을 보여준다. 창가에 붙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다음 줄 자리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면 바깥 거리의 장면들이 마치 영화 스크린처럼 잔잔하면서도 격정적이다. 창과의 거리는 바깥 이야기를 좀 더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내 눈높이와 비슷한 고도로 비둘기 서너 마리가 수평에 가까운 직선으로 활강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을 오후 네다섯 시쯤 비스듬한 햇빛에 거리의 모든 것들이 누렇게 물들어 갈 무렵이라서 눈앞의 장면은 더 극적이다. 도시에서 잘 먹은 비둘기는 살쪘지만 커다란 날개들은 살진 몸을 충분히 날릴 힘을 가졌다. 더 이상 날아오를 생각이 없는 비둘기들은 날갯짓을 하지 않고 펼친 날개로 비스듬히 공중을 미끄러지듯 활강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날개를 다시 퍼덕이며 체구의 활강을 제동하고 몸을 살짝 떠올린 뒤 은행나무 가로수나 전선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서울 도심에 아직 전봇대가 있다는 것을 비둘기들이 일깨워줬다. 전기와 통신 케이블들이 겹치고 뒤엉켜 지나가는 전봇대들이다. 늘 보이는 풍경은 보이는 것들의 개별성을 가린다. 도심의 전봇대들은 늘 보여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위를 날아가다 내려앉는 비둘기들의 유연한 몸짓의 풍경이 군더더기 없어서 놀라웠다. 아무것도 아닌 위대한 순간이다.
건너편 빌딩 외벽에 일꾼들이 밧줄에 매달려 내려오며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 아래 길가에는 주머니가 많은 작업용 조끼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정 장화를 신은 중년 남자가 맑은 날에 커다란 우산을 쓰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새마을 모자는 아니었지만, 농부 차림을 닮았다. 사람들이 빌딩 외벽에 매달려 벽면과 유리창 물청소를 하는데 바람이 불어 물방울이 멀리 까지 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쓴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 우산을 씌워주며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빴다. 행인들도 위를 쳐다보며 그를 기다려 우산을 얻어 쓰고 2~30미터 길을 서둘러 지나갔다. 서두를 일이 없어도 그 순간은 서둘러 걷게 된다. 지금껏 물청소를 하는 곳에서 그런 친절은 본 적이 없다. 친절의 디테일이 발전한 것일까 예리해진 불만의 표출 형태에 대한 사전 대응일까. 참 부질없는 생각으로 한가했다. 이날은 비둘기 두 마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활강하다 마파람이 센지 날개를 몇 번 퍼덕거리며 고도를 높였다. 커피숍 안의 배 나온 남자는 구두 뒤꿈치로 걸었다. 구두 뒷굽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으로 바닥을 긁고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전화 통화를 했다. 불만족과 조급함이 몸뚱이와 소리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는 전화벨 소리도 크고 통화 목소리도 크고 몸짓도 크다. 타인이 들어주지 않는다 생각하는 말일수록 더 크고 공격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이유가 신체적 노화뿐 아니라 욕망의 노화 때문이기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목소리가 커졌다고 해서 그 소리에 스스로가 집중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가 집중하는 건 소리의 공격성이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따릉이' 자전거를 탄 환경미화원 셋이 일렬종대로 서대문 방향으로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가고 있었다. 표정도 몸짓도 여유롭고 유연했다. 연두색 형광 작업복과 녹색 따릉이 자전거는 익숙한 관계로 보였다. 세 명이 하나 된 모습은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그림자가 길었다. 바라보기에 기분 좋은 광경이었다. 두 명도 네 명도 아닌 세 명이라는 완성된 숫자의 느낌. 따릉이 덕분에 일터에서 옮겨 다니는 것이 좀 편해졌을 것이라는 짐작, 남의 일에 은근히 다행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그 광경을 사진으로 열심히 찍었으면. 전후 맥락은 적당히 숨긴 채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고유한 시간의 단면을 숨길 만큼 숨기고 드러낼 만큼 드러낸 사진 한 장 남길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것은 내가 바라본 그 자체가 아닌 그 '어떤' 묘사로서의 사진일 것이다. 어떤 사진들은 상상 속에서 병치되고 연결된 몇몇 순간들의 살아 움직이는 장면들만큼 충만하지는 못하리라. 비둘기의 날갯짓이나 바람에 날리는 가로수 잎, 비스듬한 햇살을 받은 길거리의 사람들과 그림자,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의 주변이면서 사실 그 자체다. 사진이 아닌 기억에 담아 놓고 가끔 상상의 손으로 만져보고 하는 것도 즐겁다.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다른 얼굴로 살아나 움직이는 그 별것 없이 위대한 순간들을 나는 온전히 독점한다.
편집자주 - 사진과 보이는 것들, 지나간 시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씁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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