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미안해요 리키, 신자유주의가 매혹적이어서

박병희 2024. 1. 2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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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성과 사회'는 효율적
노동자 억압·지배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부리는 경영자로 만들어
'자유롭다' 느껴 한계 없는 착취
체제에 저항하는 혁명도 없을것

2019년 개봉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원제 Sorry We Missed You)’의 도입부는 인상적이다. 주인공 리키가 택배 회사에 취직하려고 사장과 면접하는 장면이다.

"난 성실한데 동료들이 게을러터져서 답답하더라고요. 나 혼자 일하고 내 사업을 하고 싶어요." 사장이 "멋지네요, 리키"라며 업무에 관해 설명한다. "고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겁니다. 우린 ‘승선(on-boarding)’이라고 해요. 우릴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고용 기사가 아닌 서비스 제공자가 되죠. 고용 계약 같은 거 없고 목표 실적도 없어요. 임금은 없지만 배송 수수료를 받고요. 출근 카드 같은 거 없고 알아서 일합니다. 서명하면 ‘개인 사업자 가맹주(owner driver franchisee)’가 되는 겁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죠. 전사만 살아남아요."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리키에게 개인 사업자 가맹주라는 말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영화는 결국 리키는 착취 받는, 고용된 노동자일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리키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많은 업무를 떠맡지만 이는 가정불화로 이어지고, 결국 회사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의 저자 한병철 전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가 ‘유혹적’이라고 꼬집는다. 그래서 과거 규율 사회에서처럼 체제에 저항하는 혁명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책은 저자가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논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둘 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비판적이다. 하지만 전망은 정반대다. 네그리는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가 지구적 저항에 무너질 수 있다고 기대한다. 저자는 순박하고 현실적이지 않다고 반박한다. 저자는 과거 규율 사회에서 공장 소유자는 노동자들에게 억압적이었고 이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반발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억압적이지 않고 리키의 택배 회사 사장의 말처럼 유혹적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신자유주의의 지배 체제는 리키 회사 사장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을 문제시한다."

저자는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스물두 살 때 무작정 독일로 향했다. 철학, 문학,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2010년 독일에서 ‘피로사회(Mudigkeitsgesellschaft)’를 출간해 반향을 일으켰다. 피로사회는 2012년 국내에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에 실린 인터뷰에서 저자는 피로사회가 잘 팔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 사회이며 이제는 지배가 없어도 착취가 가능하다 라는 피로사회의 근본적인 주장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규율사회에서 타자 착취가 이뤄졌다면 지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자기 착취가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자기 착취는 타자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자기 착취가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착취는 한계가 없고, 우리는 자신을 붕괴할 때까지 자발적으로 착취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글은 친절하지 않다. 저자는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풀어놓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나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다. 책 전반에 걸쳐 규율사회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다. 독자가 스스로 저자의 사유 배경을 추론하고 자료를 찾아야 한다. ‘규율사회(Disziplinargesellschaft)’는 미셸 푸코가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푸코는 근대 시기에 지배 계급이 학교, 공장, 군대, 감옥 등의 감시·억압 시스템을 적용해 사람들을 통제했다고 설명했다.

책에는 에세이 15편, 인터뷰 3편이 실렸다. 에세이는 슈피겔, 디 벨트 등 독일 신문과 잡지에 실린 칼럼들이다. 다양한 매체에 실린 칼럼이다 보니 각 에세이가 다루는 담론이 체제, 난민, 공허, 디지털 등 천차만별이다. 현대 사람들이 왜 뛰어오르는 사진을 많이 찍는지를 고찰한 에세이도 있다.

독일에서 발간된 책의 원래 제목은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Kapitalismus und Todestrieb)’이다. 죽음 충동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사용한 정신분석학 용어다. 저자는 지금 우리가 죽음 도취를 방불케 하는 생산 및 성장 도취를 체험하고 있다며 그 도취는 다가오는 치명적 파국을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 한병철 지음 |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12쪽 | 만68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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