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더 뼈아픈... 한국은 이런 대통령을 잃었다
[김성호 기자]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과 제작자, 배급사 관계자들과 자리를 가진 일이 있다. 그날 화제에 오른 건 꽤나 주목받는 다큐멘터리 한 편이었다. 개봉 한 달 동안 2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그 영화를 두고서 다큐가 2만 명이나 되는 관객을 모으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1000만 관객을 훌쩍 넘긴 영화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게 한국영화판이라지만 다큐멘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그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가운데서도 제법 시장성이 있다고 평가되는 부문이 있다. 다름 아닌 정치다큐다. 정치인을 내세운 다큐멘터리는 얼어붙은 시장 가운데서도 놀라울 만한 흥행수익을 올리고는 한다. 단적으로 지난해 최고 흥행수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는 무려 11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문재인입니다>였다. 역대 기록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서 2017년 개봉한 <노무현입니다>는 무려 185만 명, 그 전년도 나온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19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비슷한 제작비의 다른 개봉 다큐와 비교한다면 초대박이라 해도 좋을 성적이다.
▲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 포스터 |
ⓒ 아이오케이컴퍼니 |
개봉 2주 만에 10만 명이 관람한 <길위에 김대중>은 한국 정치다큐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새겼다. 다큐 특성상 상영시간대가 그리 좋지만은 않지만, 어느 상영관을 찾아도 나이 지긋한 관객이 제법 들어찬 모습을 마주할 만큼 은근한 인기를 누린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개봉한 이 다큐는 그의 일대기 전반을 생생하게 훑어나간다.
영화는 그가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낸 일제강점기로부터 1987년 제13대 대선 직전까지를 다룬다. 즉 야심찬 청년 김대중이 해운업을 바탕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하고 정치에 입문하기까지의 과정,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로 우뚝 서고, 정권으로부터 탄압받는 이야기를 그린다. 말하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는 거물 정치인 김대중의 탄생, '김대중 비긴즈'라 해도 좋겠다.
▲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
ⓒ 아이오케이컴퍼니 |
야심만만한 청년 정치가가 어떻게 한국 민주주의의 거두로 성장하게 되는지, 그가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이들과 호남민중들의 굳건한 지지를 어떻게 얻게 되는지를 영화는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독재가 그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이념대립과 지역주의를 조장한 가운데 그 너머 평화가 깃든 미래를 흔들림 없이 바라본 정치인 김대중의 모습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납치와 살해위협, 감금과 투옥, 사형선고 등 지속된 위기 속에서 담금질 되며 마침내 국민적 지지를 얻어낸 대 정치가의 모습이 극 영화가 아닌 다큐임에도 감격적으로 그려진다.
▲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
ⓒ 아이오케이컴퍼니 |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독재정권 치하에서도 흔들림 없이 미래를 꿰뚫어 본 남다른 통찰이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년이 흐른 당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반공의 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건 보통의 정치가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고난을 통하여 김대중은 그저 대중에 영합하여 표를 끌어 모으는 흔한 정치인이 아닌, 대중을 일깨우고 흩어진 열망을 결집시키는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로부터 이념대립 아래 희생되던 국민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걸 수 있는 지도자로 차츰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
ⓒ 아이오케이컴퍼니 |
<길위에 김대중>은 그를 기억하는 여러 인물의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그의 행보를 재구성한다. 비교적 자료가 풍부하게 남은 정치인임에도 현대사를 따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에겐 처음 보는 내용 또한 적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야구장에서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모습이라거나 광주를 방문하는 길에 늘어선 대중들의 모습 같은 장면이 생소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이나 위인전에 등장하는 해외 정치가들의 일화들을 친숙하게 여기면서도 한국 정치가 낳았고 세계가 인정한 김대중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이 영화는 분명한 시사점을 남긴다. 10만을 넘어 더 많은 관객에게 한국도 이 같은 지도자를 가졌던 적이 있음을 알게끔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특히 철 지난 이념이며 시대에 영합하는 정치가들의 행보가 국민을 한숨짓게 하는 오늘의 정국에서 김대중을 다시 기억하는 일은 유의미하다. 국민들의 열망은 여전히 흩어져 있고, 위기는 코앞으로 닥쳐왔음에도, 그를 결집해 국가와 국민을 미래로 이끌어갈 지도자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길위에 김대중>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가 김대중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4시간 콧줄에, 폐기능 19%... 이 사람들 다 어떡할 거예요?
- 민주당 현역 80명 "국힘과 야합해 병립 퇴행? 악수 중 악수"
- [이충재 칼럼] 그들만의 '왕 놀음'
- 차 한 잔 시켜 놓고는 온종일 앉아 있다고 컵 던지다니
- "자식장사 하냐는 악플러, 잡고보니 아이들...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 껑충 뛴 대통령 부정평가... 응답자 "김건희 여사 때문"
- 수입의 80% 먹는 것에... 어느 4인 가족의 식비 공개합니다
- '상인 패싱' 밝혀져도 침묵... "아니면 말고" 식의 대통령실
- "위성정당 없는 준연동형이 국민 뜻... 민주당은 매주 달라"
- 한일관계 뇌관 건드린 판결, 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