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장사 하냐는 악플러, 잡고보니 아이들...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자말>
[히니]
▲ 김빛나라양 사진 |
ⓒ 김정화 |
자식 일로 위원장을 한다는 것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다던 김정화씨(0416단원고가족협의회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종종 눈물을 훔쳤다. 그는 딸 또래의 필자를 위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난해 11월 만난 정화씨가 그동안 외면하고 지냈던 기억을 조금씩 꺼냈다.
"수학여행 가던 날, 애가 일어나서는 꿈을 꿨다더라고요. 타이타닉에 자기가 타고 있었는데 배가 뒤집혀서 바다에 빠졌다는 거예요. 제가 바쁘게 아침 준비하느라, 아이가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죠."
꿈은 반대라는 정화씨의 말을 듣고 집을 나선 김빛나라양은 그날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 정화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딸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 같다고 했다.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예정된 시간에 배가 출항하지 않아 발이 묶여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도, 잊고 있던 수학여행비를 하루 전에 급히 입금한 것도, 충분히 딸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던 여러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 같았다.
예체능에 소질이 있던 딸을 설득해 단원고로 입학시킨 지난 시간마저도 모두 후회됐다. 시간을 돌릴 수 없는 현실은 딸을 잃은 아픔에 자꾸만 자책으로 얼룩졌다.
"엄마, 얼른 교회에 가서 기도해줘"
자녀 교육 문제로 집에 TV가 없어 정화씨는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을 다른 학부모의 전화로 알게 됐다. 곧장 딸의 번호로 전화하자 빛나라양은 배가 가라앉고 있다며, 배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기도해달라고 했다. 정화씨는 남편과 급히 단원고로 향했다. 배가 가라앉고 있다니 불안했지만, 내심 큰일이야 생기겠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딸과의 통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학부모들이 모인 강당은 아비규환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강당의 대형 TV 속 '전원 구조'됐다는 뉴스에 정화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심하기는 일렀다. 곧이어 화면에 뜬 '오보'라는 문구에 학부모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학교에서 반 별로 한 대씩, 그러니까 전세버스 10대를 마련해줬어요. 근데 진도에 내려가서 애들을 태우면 부모랑 아이까지 버스에 다 못 타게 되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자차로 내려갔어요."
정화씨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 물에 젖었을 딸을 떠올리며 속옷과 겉옷을 챙겼다. 진도로 향하는 동안 딸에게 몇 차례 전화했지만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딸이 잘못됐으리라는 생각은 못 했다.
정신없이 내달려 진도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정화씨 눈에 들어온 건 벽에 붙은 생존자 명단이었다. 그곳에 '김빛나라'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체육관 한편에 단원고 교복을 입은 채로 담요를 덮은 수십 명의 학생을 보고는, 곧 딸도 이곳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한 아이가 '빛나라는 다음 배에 올 거예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다렸죠. 그런데 진도 체육관에 도착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나도 애가 안 와요. 그때까지도 우리 애가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금방 집에 돌아갈 줄 알았기에 정화씨 부부는 아무런 짐도 없이 진도까지 갔다. 다음날, 그다음 날이 됐어도 딸은 오지 않았다. 진도 체육관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군함까지 동원해 생존자를 구조하는 중이라는 뉴스만 나왔다. 밖의 상황을 알 수 없어 답답했던 정화씨는 팽목항에서 밤을 지새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통화를 할 때마다 남편이 무슨 소리냐, 팽목항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요. 뉴스에서 하는 말이랑 맞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진도체육관에 모인 학부모들 사이에서 청와대로 가자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죽음으로 변한 학생들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
▲ 김정화(0416단원고가족협의회 위원장). |
ⓒ 히니 |
"요새 결혼식장에 가면 생각이 많이 나요. 살아있으면 27살이거든요. 결혼할 나이니까. 조카들 결혼식에 가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만 보면, 이제 우리 빛나라 차롄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죠. 젊은 사람을 보면, 우리 애가 어떻게 컸을지 상상해요."
참사 후 몇 년 동안은 긴 머리의 고등학생 뒷모습만 봐도 쫓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딸이 하늘에 있다는 걸 주문처럼 외웠지만 소용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매 순간 딸이 떠올랐다.
"매일 라면만 먹고 살아도, 단칸방에 살아도, 우리 빛나라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거, 말이 쉽지 절대 그렇게 안 돼요. 자식을 먼저 보내서 가슴이 찢어진다고 표현하는 것도 아쉬울 정도예요."
잃은 자식을 되찾을 수 없다면, 죽음의 이유라도 알아야 했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어쩌다가 바다에 빠졌는지, 왜 초기에 구조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는지, 해경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컨트롤타워는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알아야 했다. 팽목항에 왔어도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대통령의 얼굴은커녕 머리칼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어느 날 정부는 세월호참사 국가 배·보상 동의안을 내밀었다. 평생 나라를 믿고 살았고, 나라가 시키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각 가정에는 돌봐야 할 남은 자식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에서는 국가 배·보상을 거부하고 소송을 했더라고요. 2018년에 국가 상대로 승소를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선택지가 있는지 몰랐거든요. 정부는 그걸 모른 척하고 동의안에 서명하라고 한 거죠."
정화씨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동의안에 서명한 유족들이 있는가 하면 배·보상을 거부하고 소송한 유족들도 있었다. 국가는 소송 참여 여부에 따라 지급할 배상금을 달리했다. 그저 국가만 믿고 기다린 결과는 유가족들의 가슴에 또 한 번 상처를 냈다. 이대로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배·보상 안에 사인했던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0416단원고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를 두고 인터넷에서는 "장사한다"라거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래서 사이버 수사대에 의뢰를 해서 다 잡아들였더니, 우리 애 또래가 많았어요. 걔들이 뭘 알고 그랬겠어요. 어린 학생들은 다 선처를 해줬죠."
악플만큼이나 정화씨를 괴롭힌 건 잘못된 내용을 보도하거나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일부 언론사들이었다. 법적 절차를 밟고 싶어도 세월호참사 유가족 전부가 비난당할까 봐 그럴 수 없었다. 정확히는 "또 단원고"라는 말이 나올까 봐 두려웠다. 세월호 관련 유가족 협의회는 하나가 아닌데도, 정화씨가 보기에 사람들은 마치 모두 같은 단체로 보는 것 같았다.
"인천의 일반인 유가족 협의회가 원했던 추모공원은 이미 몇 년 전에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단원고 희생자들을 위해서는 된 게 아직 아무것도 없어요. 4.16생명안전공원 만든다고 해놓고서는 지금도 시작을 안 하고 있잖아요. 이러니까 우리가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를 하는 건데, 사람들은 계속 세월호 이야기한다고 하니까 속상하죠."
▲ 0416단원고가족협의회 활동 사진2. |
ⓒ 김정화 |
정화씨는 "0416단원고가족협의회가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으로 모였지만, 지금까지 모임이 유지되는 건 세월호를 알리려는 목적 하나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다. 안산 지역주민들이 내민 손길을 맞잡을 여력이 없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려 자꾸 모인다고 했다. 새해에는 노인정에서 떡국떡을 나누거나, 어린이날에 선물꾸러미를 나누며 안전 캠페인을 했다.
안전에 대한 정화씨의 고민이 깊어지던 사이,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조카를 따라 몇 번 가본 이태원 거리에서 벌어진 참사에 정화씨는 다시 세월호가 떠올랐다.
"이태원은 늘 사람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엔 어른들이 잘 안 가요. 진작부터 어른들이 그곳에 관심을 갖고, 안전사고의 위험이나 문제들을 발견했다면 젊은 청년들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길거리에서 주검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너무 황당하잖아요. 세월호도 그래요. 증축하면 안 되는데 증축했고, 원래 우리 아이들이 타려던 배도 아니었고. 대형 참사를 들여다보면 평소에 문제가 있어도 그냥 내버려두다 사건이 터지면 우왕좌왕하기 바빠요."
재난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안일하게만 생각했던 작은 문제들이 모여서 점점 커지고, 재난으로 일상을 덮쳤다. 노동자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사망한 사고도, 제천 화재도, 이태원참사도,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정화씨가 보기에는 모두 세월호참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건처럼 보였다. 그가 참사와 죽음의 행렬에도 계속 싸우는 이유가 있다.
"안전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안전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나 혼자서 어떤 희망을 걸고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보고 있는 것에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고 싶어요."
"위로가 그렇게 힘든가요?"
광화문에 설치된 세월호 기억공간을 철거하라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통보 후, "한 번 더 이사 가자"라는 문구가 적힌 유족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아래에 "이제는 제발 그만하라"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글이 빼곡했다.
"저는 정치 잘 몰라요. 그냥 싫어요. 이젠. 우리가 원하는 거는 돈도 아니고, 정쟁도 아니에요.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며 우리 마음을 알아주는 거예요. 위로가 그렇게 힘든가요?"
정화씨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는가 하면, 유가족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기쁨도 슬픔도 적당히 감춰야 했다. 게다가 0416단원고가족협의회의 위원장인 만큼 힘들면 안 되는 사람이어야 했다. 어느샌가 정화씨는 주변의 시선에 자신의 감정을 맞춰가고 있었다.
문득 슬픔 속에 사는 엄마를 하늘에서 보고 있을 딸 빛나라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다시 자신을 찾으려 애썼다. 여러 취미 활동을 하고, 공부도 했다. 자신과 일상을 되찾는다고 해서 딸을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느끼는 감정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는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유족들을 보면 '저게 뭐야' 하고 안 좋게 보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나름대로 자신을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겠죠. 겪어보니 알겠더라고요. 그렇다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같은 유가족한테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긴 시간 자신과 딸을 동일시 하다 이제는 딸의 부재를 인정하는 한편, 자신의 속도대로 일상을 보내는 정화씨는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각자가 가진 속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웃고, 떠들고, 즐거운 일상을 산다고 해서 우리 빛나라를 잊은 게 아니잖아요. 이건 내 삶이에요.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작은 것부터 조금씩 해나가고, 다시 내 삶을 사는 게 먼저 떠난 우리 딸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정화씨에게 시간은 약이 될 수 없었다. 청소년기에서 멈춰버린 딸의 시간을 간직한 채 성인이 된 모습을,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시간이 지나서 잊히기는커녕 그리움만 늘었다. 둘째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때도, 빛나라양이 사망했던 18살이 되던 때도 자꾸만 불안했다. 다른 학부모들도 정화씨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모인 0416단원고가족협의회는 그 불안과 트라우마를 동력 삼아 이제 모든 이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작게나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대형 참사를 겪고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언제까지 이어갈지 모르는 이 싸움을 앞둔 정화씨는 두려움도 걱정도 없다고 말했다.
"두려움요?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자식을 잃고 나니까 두려운 것도 없어요. 다른 사람의 오해나 시선도 무섭지 않고요. 싸움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바라는 게 있다면 세월호 10주기에 정치인들 늘상 하는 보여주기식 요식행위 말고,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고 또 나라가 아이들을 안전하게 기를 수 있도록 돕는 그런 나라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 김빛나라양이 그린 그림 |
ⓒ 김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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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서울 밖에도 사람이 산다(2023,이르비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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