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의사들 손사래 “분만 안 받아요” [사라진 분만실②]
“의료사고 날까봐 불안…누가 분만진료 하고 싶겠나”
대만은 의료사고 국가 전적 책임…지원율 74→94% 급증
“불가항력적 분만 의료사고 보상제도 개선해야”
“분만 진료를 볼 때 매 순간이 러시안룰렛 같아요. 운 없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하는 거죠.”
24일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느끼는 심정을 이같이 표현했다. 러시안룰렛은 회전식 연발권총에 하나의 총알만 장전하고 여러 명이 차례로 머리에 총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건 게임이다. 분만 시 의료사고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몰라 복불복 게임 같다는 얘기다.
산부인과는 다른 과목에 비해 법적 위험 부담이 크다. 분만 전 태아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의학적 한계가 있는 탓이다. 특히 분만의료는 1명의 임신부를 관리해 신생아까지 2명을 책임지는 구조다. 임신부에 대한 피해보상에 더해 신생아의 평생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배상금이 천문학적 규모에 달한다. 실제 법원은 지난해 5월 뇌성마비로 태어난 신생아의 분만을 담당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5552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에 산부인과 의사들은 분만진료에서 하나 둘 손을 떼고 있다. 2019년도 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분만병원에서 근무하는 산부인과 전문의는 2659명으로, 임상 현장에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5800명)의 45.8%에 불과하다.
김동석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초대 회장은 “손해보상 비용이 10억이 넘어가는데, 누가 분만진료를 하고 싶겠는가”라며 “의료사고가 고의나 과실이 있다면 당연히 처벌해야 하지만 선의의 진료 중에 환자가 사망하거나 아이가 잘못됐다고 의사에게 무거운 형별을 지게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토로했다.
의료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돌려보내는 경우도 있다. 김재연 회장은 “감이 안 좋다 싶으면 다른 병원으로 보낸다”며 “러시안룰렛을 돌리는데 총알을 맞을 필요가 없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이미 기피과로 전락한 산부인과 안에서도 산과(분만)를 전공하려는 의사는 드물다. 특히 분만이 아닌 부인과 진료, 난임 치료 등으로 눈을 돌리는 젊은 의사들이 많다. 설현주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4년차 전공의·전임의 47%가 ‘전문의 취득 및 전임의 수련 이후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이 중 79%는 ‘분만 관련 의료사고 우려 및 발생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동석 회장은 “올해 산부인과 전공의 충원율이 63%라고 하는데, 전문의 취득 후 분만을 하겠다는 의사는 10명도 안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금준 고려대구로병원 산부인과 교수도 “요즘 산부인과 전공의들이 산과(분만)를 안 하려고 한다”며 “부인과나 난임, 불임 쪽으로만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젊은 분만 의사가 사라지면, 분만 병원의 ‘도미노 폐원’ 사태는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내달 분만 진료를 중단하는 부산 정관일신기독병원, 지난해 경영난으로 폐원한 광주의 대형 산부인과인 문화여성병원 같은 사례가 또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양신호 중앙대광명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현재 비수도권은 산과 의사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심지어 종합병원조차도 산부인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서 분만을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지역 상급종합병원에서 전원이 돼서 온 산모도 있었다”고 밝혔다.
의사들은 의료소송 부담을 덜어줘야 산부인과 기피 현상이 해소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재연 회장은 “의료소송 부담에 대한 사회안전망이 확보되는 것이 1순위”라고 강조했다. 조금준 교수도 “법적 리스크를 덜어서 의사가 마음 놓고 분만진료를 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를 손보는 것이 선결 과제라는 지적이다. 정부는 의료진 과실이 없는 불가항력 분만사고에 대해 피해보상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억대에 이르는 배상금에 비해 정부가 지원하고 있는 보상 한도액은 3000만원에 불과하다.
국가가 의료사고 배상 책임을 지면, 산부인과 지원율이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실제 대만은 지난 2014년부터 출산 중 발생한 사고에 대해선 국가가 환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제도 시행 이후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율이 74%에서 94%로 급증했다.
황종윤 강원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한국모자보건학회지 ‘분만 의료전달체계의 한계와 발전방안’을 통해 “불가항력적 분만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국가의 공적 책임을 위해 100% 국가가 지원하고, 지원 금액도 5억원으로 상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저출산 시대에 민간 분만 병원의 폐업은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지만 분만의료는 국가의 필수의료이고 분만 없이 국가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접근을 통해 분만 의료전달체계가 완성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은빈, 신대현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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