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억울한 옥살이 20년…보상 받고도 공장 일 왜

김선미 2024. 1. 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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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여씨, 장학회 이사 된 까닭

■ 나는 무죄입니다

「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혹은 화성연쇄살인사건. 영화 ‘살인의 추억’의 그 사건. 영화처럼 현실에서도 말도 안 되는 증거 조작이 있었습니다. 못 살고 못 배운, 게다가 몸도 불편한 청년을 범인으로 몰았습니다. 소아마비 장애인이 담벼락을 타고 넘다니요? 20년 옥살이, 윤성여씨의 사연입니다. 뒤늦게 알았습니다. 진범 이춘재는 윤씨 초등학교 친구의 형이었습니다.

무죄를 인정받은 윤성여씨는 “20년 공백을 메우는 데 7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일대에서 여성 10명이 강간·살해당했다. 용의자가 검거된 것은 8차 사건이 유일하다. 1988년 9월 16일 박모(14)양이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이듬해 7월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윤성여(56)씨가 범인으로 검거됐다. 경찰은 윤씨가 앞선 7건의 사건을 보고 모방범죄를 저질렀다고 결론 내렸다. 89년 10월, 윤씨는 1심에서 강간치사·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9년 8월 모범수로 출소할 때까지 20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난 건 11년 뒤였다. 2019년 9월,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이춘재(61)가 용의자로 특정됐고, 범행을 자백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 윤씨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31년 만이었다.

윤씨는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피의자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중앙포토]

지난해 겨울,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 앞에서 윤씨와 만났다. 윤씨는 왼쪽 다리가 불편해 걸을 때마다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만 14년 넘게 자동차 가죽 시트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왕복 두 시간 거리를 오가며 한주씩 번갈아 주간·야간 근무를 한다. 윤씨는 누명을 벗으면서 국가로부터 형사보상금과 손해배상금을 받았다. “편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에 그가 웃었다. 윤씨는 “내 지난 인생을 보상받은 돈이지만, 잃어버린 인생을 돌릴 순 없잖아요. 허투루 쓰기 싫어요. 내가 자립할 수 있으면 그걸로 먹고사는 거죠”라고 말했다. 윤씨는 다세대주택에 세 들어 살다가 7개월 전 지어진 지 29년 된 22평짜리 아파트로 이사왔다. 눈에 띄는 살림살이는 거실에 놓인 안마의자 정도였다. 그는 “정말 큰 마음 먹고 샀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재심 사건 피해자들과 함께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돕는 등대장학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윤씨는 3세 때 고열을 앓은 뒤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다. 10세 되던 해 겨울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70년대에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에 다녔던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진 뒤 자취를 감췄다. 윤씨를 포함해 사 남매는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윤씨는 경기도 안성 친척 집을 거쳐 화성으로 갔다. 우연히 동네에서 농기구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을 알게 되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화성시 전체가 연쇄살인 사건으로 술렁였다. 89년 7월 어느 날 저녁 경찰이 찾아와 “네가 8차 범인이지”라며 수갑을 채웠다. 당시 경찰은 “장애라는 신체적 특성 때문에 (성폭행) 범행이 쉽게 발견될 것을 우려해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윤씨의 설명은 달랐다. 그는 “한 3~4일을 안 재웠어. 그러면 내가 뭘 말했는지 몰라. 그냥 쓰라고 하면 받아 쓰고, (지장) 찍으라고 하면 찍었다”고 말했다.

사진 오른쪽이 윤씨를 믿어준 박종덕 청주교도소 계장(오른쪽). [중앙포토]

몸이 불편한 그에게 교도소 생활은 혹독했다. 장애를 조롱하는 이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일도 잦았다.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게 매일의 목표였다. 교도소 안에서 그의 별명은 ‘무죄’였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도 이야기하니 사람들이 붙여줬다. 그는 가수 하춘화의 노래 ‘무죄’를 달고 살았다고 했다.

무죄를 인정받은 윤성여씨

2019년 9월 18일, 윤씨는 진범 관련 보도가 나왔던 날을 떠올렸다. DNA 검사로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윤씨는 당시 기쁨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고 했다. 윤씨는 “어렵게 들어간 직장인데 사건 터지면 바로 잘릴 거 아니야.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엄마 때문이었지. 내가 죽어서 엄마를 볼 때 떳떳해지고 싶었다”며 재심을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중에 들으니 이춘재는 윤씨와 초등학교때부터 친했던 친구의 형이었다. 그는 “참 기구한 운명이지. 그래도 내 사건 빼고 자백했으면 나는 이 죄를 평생 갖고 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그게 고맙기도 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인터뷰 말미에 교도소에서 자신을 살려준 은인을 꼭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박종덕(58) 청주교도소 사회복지과 계장이었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는 윤씨의 말을 믿어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죽을 용기로 살라”고 북돋으며, 윤씨가 취업할 만한 곳을 알아봐 주기도 했다. 출소 뒤 윤씨는 박씨를 ‘형’이라고 불렀다. 박씨는 “평생 고생만 했으니까, 이제 자신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지금 삶이 성여를 행복하게 한다면, 저도 그걸로 족해요”라고 말했다.

■ ‘나는 무죄입니다’는 누명을 쓰고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어떤 돈으로도 보상받지 못하는 억울한 세월을 버텨야 했던 이들. 그들의 자세한 사연은 더중앙플러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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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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