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투자 땐 30년간 억대연봉"…취업·결혼 이래서 미룬다 [유예사회 갇힌 한국]
“솔직히 3년 투자해 30년 넘게 억대 연봉이 보장되는데 유예할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요.”
수도권 4년제 대학 경제학을 전공한 최은영(28)씨는 필수학점을 모두 이수했지만 졸업은 3년째 미루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인회계사(CPA) 자격증 시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다. 최씨는 “인생의 5년 이상 더 투자할 각오가 돼 있다”고도 했다.
중앙일보가 심층 인터뷰한 ‘유예 세대(Delayed Generation)’ 25명은 대학 졸업과 취업·결혼·출산 등 인생 시간표를 미룬 이유에 대해 “미래의 고소득이나 안정적 직장, 경력 관리를 위한 투자”라고 설명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들이 유예한 건 대학 졸업(16명)이 가장 많았고, 취업(14명), 결혼(10명)이 뒤를 이었다. “미룬 것을 후회한다”고 한 응답자는 전체 25명 중 단 2명에 그쳤다. 대부분은 현 세대에겐 인생 시계를 늦추는 건 ‘옵션’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했다.
“3년 투자하면 30년 간 억대 연봉은 기본인데”
3년차 약사인 권누리(34)씨는 27세 때 3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약학대학 편입을 준비했다. 28세에 약대에 합격해 현재 서울의 한 약국에서 일하고 있다. 급여는 전 직장과 비교해 2배인 세후 500만원으로 늘었다. 권씨는 “회사를 다닐 땐 개인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며 “여성이다보니 경력 단절이 비교적 덜한 직업을 갖고 싶어 20대를 투자했다”고 말했다. 권씨처럼 진로를 선회한 경우를 포함해 6명의 응답자(24%)가 노후에도 안정적 수입이 보장된 전문직 자격증을 따기 위해 자발적으로 유예를 택했다. 노무사 시험을 3년째 준비 중인 김정호(26)씨는 “문과생은 취업하기 힘들지 않냐”며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자는 심정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턴 기회, 공백 공포 때문에 졸업 못 해”
‘취업 절벽’ 앞에서 채용과 연관된 인턴 등 스펙을 쌓으려고 비자발적으로 취업을 미룬 경우도 많았다. 취업준비생 강현우(28)씨는 3학기째 졸업을 늦췄다. 재학생이 졸업자보다 기회가 더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씨가 1순위로 지망하는 회사는 ‘지난해 12월~오는 8월 사이에 졸업 예정인 재학생’이라고 구체적인 조건을 달았다. 강씨는 “요즘 인턴을 금(金)턴이라고 하는데 원서 한 장이 아쉬운 마당에 굳이 졸업할 이유가 없다”며 “아무 스펙도, 생각도 없이 학교 밖으로 나갔다가 사회의 매운맛을 볼 생각을 하면 무섭다”고 말했다. 서울 소재 2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염은중(23)씨도 “취업할 때 기업은 ‘노력’하는 인재를 찾는데, 졸업하면 백수로 빈둥빈둥 시간만 보낸 것 같은 느낌을 줄 것 같다”고 말했다.
유예하니 ‘정규직 취업률·실질임금’ 높아져
청년들은 유예가 결국엔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질 거란 기대감을 품고 있다. 유예는 청년이 선망하는 일자리가 계속 줄어가는 한국 경제의 변화에 대한 일종의 ‘생존 적응’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국교육재정경제학회에 따르면, 대학 졸업 유예 경험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취업률은 1.15배 낮았지만, 정규직 취업률은 1.24배, 월평균 실질임금은 6.3%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늦게 취업한 만큼 결혼과 출산으로 가정을 꾸리는 시기 역시 연쇄적으로 미뤄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30세에 미혼인 남성의 비율은 69년생 37.2%→79년생 62.5%→89년생은 73.5%로 20년간 두 배로 늘었다. 이필남 홍익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교육·문화 수준은 높아지는데 사회·경제 불확실성은 커져 생긴 연쇄적인 현상”이라며 “대졸부터 시작된 유예의 높은 사회적 비용을 고려할 때 국가 수준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선미·신혜연·김서원·박종서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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