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이곳의 온기가 좋다”… 쪽방촌 ‘겨울 사랑방’ 된 목욕탕

최승훈·방유경 2024. 1. 2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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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밤추위대피소 가보니
이용권 내고 욕탕·수면실서 겨울밤 보내
“남 눈치 볼 필요 없어 좋다”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김모(58)씨가 ‘밤추위대피소’를 이용하기 위해 이용권을 내밀고 있다. 김씨 카운터 직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최승훈 인턴기자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 14도까지 떨어졌던 지난 23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창신동 ‘현대옥사우나’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목욕도 할 거에요. 면도기도 같이 주세요.” 창신동 쪽방촌 주민 김모(58)씨가 안경에 뿌옇게 서린 김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지갑에서 ‘밤추위대피소 이용권’이라고 적힌 명함 크기의 노란색 종이 한 장과 면도기값 천원을 내밀었다. 이어 명부에 이름을 적고 옷과 수건, 자비로 산 일회용 면도기까지 받아들고 탈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김씨는 옷을 가지런히 벗어둔 뒤 욕탕으로 들어가 뜨끈한 물에 몸을 녹였다. 목욕을 마치고는 반소매 찜질복으로 환복한 뒤 2층 수면실로 향했다. 그는 추운 겨울밤 종종 이곳을 찾아 TV를 보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잠을 잔다고 했다.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의 ‘현대옥사우나' 카운터의 모습(왼쪽)과 밤추위대피소 이용권(오른쪽). 방유경 인턴기자
“더 이상 쪽방에서 떨지 않아”…호평

이곳은 서울시가 쪽방촌 주민들이 추위를 피해 쉴 수 있도록 올 1월 1일부터 다음 달 29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밤추위대피소’다. 이는 서울시가 한미그룹의 지원을 받아 쪽방촌 주민들에게 목욕탕 이용권을 제공하는 ‘동행목욕탕’ 사업의 연장선이다. 지난해 여름 폭염 대비책으로 시행한 ‘밤더위대피소’가 주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자 서울시는 이번 겨울엔 추위대피소로 개장해 선보이게 됐다.

5년 전부터 쪽방촌에서 살고 있는 김씨는 일주일에 3번 이상 이곳을 이용하는 단골이다. 그는 “겨울철에는 창문을 열지 못해 방이 눅눅하고 여럿이서 온수기 한 대를 나눠 써야 해 불편했다”며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탕에 들어가서 목욕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이날 밤추위대피소를 찾은 다른 쪽방 주민 고수현(63)씨도 이곳의 온기가 좋아 자주 방문한다. 고씨는 “집 전기패널이 고장 나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장갑까지 낀 채 버틸 때가 많았다”며 “정말 추운 날에는 문밖을 나서는 것조차 망설여지지만 막상 대피소에 와서 찜질복을 입고 쉬면 참 좋다”고 했다.

현대옥사우나 내부 모습.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방유경 인턴기자


현대옥사우나를 23년째 운영 중인 이태영(84) 사장은 밤추위대피소 운영 제안을 받고 기꺼이 승낙했다. 코로나19 유행기를 거치며 큰 빚이 생겨 사우나를 계속 운영하기 어려웠지만 서울시에서 최소 손님 수를 보장해 줘 부담이 적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도 쪽방촌 주민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어 시와 계약할 때 이용료를 내려서 받기로 했다”며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보일러도 세게 틀고 온풍기도 수리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또 “처음엔 주민들이 쭈뼛거리면서 이용권만 조용히 내밀곤 했는데 이제는 단골처럼 익숙한 듯 오가며 인사를 건넨다”며 “가능하다면 매년 밤추위대피소를 운영해 가능한 많은 주민이 이곳을 찾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내 집’ 두고 가기 낯설어하기도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20일 기준 종로·서울역·남대문·영등포 밤추위대피소에서 모두 531장의 이용권이 사용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여름에 진행했던 밤더위대피소에 비해 밤추위대피소의 이용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며 “작년 여름에 밤더위대피소를 이용하면서 같이 목욕도 하고 수다도 떨며 (이곳이) 편해진 분들이 다시 찾아오시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밤추위대피소를 이용해 본 주민들은 대다수가 호평하는 가운데, 아직 이곳을 이용한 적이 없는 이들도 많은 상황이다. 춥고 불편하더라도 ‘내 집’을 놔두고, 대피소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낯설기 때문이다.

같은 날 돈의동 쪽방촌 한 골목에서 만난 송종택(48)씨는 “고령의 쪽방촌 주민들은 걸음이 불편하거나 꽁꽁 언 바닥에 미끄러질까 걱정한다”며 “대신 원래 자주 이용하던 쪽방주민공동시설 샤워실을 주로 이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돈의동 쪽방촌에서 50년 넘게 살았다는 김효숙(70)씨도 “상담소에서 추위대피소를 열심히 알리고 있지만, 아직은 돈의동에 있는 동행목욕탕만 이용하고 있다”며 “늦은 밤에 어두운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지난 23일 방문한 돈의동 쪽방촌 모습. 한 사람만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골목 구석에 물이 고여 얼어있다. 방유경 인턴기자


이에 서울시와 일부 목욕탕 업주들은 밤추위대피소 운영시간을 유동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쪽방촌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이른 시간에 일과를 마치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통상의 대피소 운영 시간은 오후 9시부터 이튿날 오전 6시까지지만, 주민들이 시간적, 심리적으로 여유를 갖고 대피소의 온기를 더 안고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난해 12월 기준 서울시내 쪽방촌 주민의 숫자는 모두 2399명이다. 쪽방상담소는 대피소의 온기가 쪽방촌 구석구석에 닿도록 주민들 집을 일일이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어 밤추위대피소를 설명하고 홍보하고 있다. 여기에 목욕탕 업주분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더해져 대피소를 찾는 발걸음이 점차 늘고 있다고 한다.

서울 종로구 쪽방촌 곳곳에 ‘밤추위대피소’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있다. 방유경 인턴기자


이형석 창신동 쪽방상담소 사회복지사는 “아직 주민들이 자연스레 밤추위대피소를 떠올리는 단계는 아니지만, 점차 이곳에 익숙해지면 더 자주 이용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오늘같은 추위에 대피소로 꼭 찾아오실 수 있도록 더 적극적으로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최승훈·방유경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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