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

임세정,문화체육부 2024. 1. 26.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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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이 돼 가는데도 아직 묘비명을 정하지 못했다.

다른 사례를 참고하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추모공원에 갈 때마다 다른 이들의 묘비명을 돌아보기도 했다.

자신의 묘비명까지 준비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은 아마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묘비명 얘기로 돌아가면,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누군가 정한 내 묘비명이 정작 내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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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이 돼 가는데도 아직 묘비명을 정하지 못했다. 검은 바탕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묘비를 볼 때마다 다음엔 꼭 정해서 와야지, 올해 안에는 결정해야지 다짐하지만 막상 확정하려고 하면 ‘이게 아닌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한 사람의 인생을 몇 개의 단어로만 정리해 보려니 쉽지 않았다. 생판 남의 전기를 쓰듯 객관적인 판단을 집어넣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아빠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 가사를 쓸까, 이제라도 전하고 싶은 말을 쓸까. 가족들의 의견을 모아봐도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장르도, 접수 기간도 제한이 없는 묘비명 공모가 계속됐다.

다른 사례를 참고하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추모공원에 갈 때마다 다른 이들의 묘비명을 돌아보기도 했다. 처음엔 비어 있던 자리들이 점점 차면서 다양한 묘비명이 등장했다. 유족들은 성경 문구를, 돌아가신 분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를, 시 구절을 묘비에 새겼다. 자신의 묘비명까지 준비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은 아마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겠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내 죽음에 대해서도, 주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산 입에 풀칠하는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할뿐더러 ‘끝’ ‘헤어짐’ 같은 단어를 떠올리면 자꾸 슬퍼지고 억울한 기분이 들어(MBTI 구분에 따르면 나는 ‘확신의 F’이므로) 애써 모른 체하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잇달아 공개됐다. 웹툰 원작의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이재, 곧 죽습니다’는 삶을 비관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끊은 주인공 이재(서인국)가 열두 번 환생해 각기 다른 죽음을 경험하는 내용을 담았다. 환생과 죽음을 통해 이재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를 포기했는지, 주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깨닫는다.

설 연휴 직전 개봉하는 영화 ‘소풍’은 60년 지기 은심(나문희), 금순(김영옥), 태호(박근형)가 노년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지난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막 피기 시작한 청춘에 만나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맛본 소꿉친구들이 태호의 죽음 이후 담담하고 유쾌하게 마지막 소풍을 준비하는 모습이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게 그려졌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흩어질, 나는 가벼운 모래 알갱이. 그대 이 모래에 작은 발걸음을 내어요. 깊게 패이지 않을 만큼 가볍게.’ 영화 말미에 가수 임영웅의 ‘모래 알갱이’가 삽입됐는데, 인간은 우주의 티끌처럼 작고 약하지만 서로의 기댈 곳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내용의 노랫말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콘텐츠들은 죽은 이와 남겨진 이들의 사연을 통해 인간의 유한한 삶이 가진 가치와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을 보여준다. 먼 훗날 내가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은 어떻게 기억될까. 힘들어도 살아낼 이유가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일은 자신의 몫일 테다. 남겨진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많을 때 내가 맞닥뜨릴 죽음을 기억해야 그런 삶에 가까이 가지 않을까.

묘비명 얘기로 돌아가면,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누군가 정한 내 묘비명이 정작 내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지난해 시집을 낸 개그맨 양세형이 몇 해 전 자신이 생각해 둔 묘비명을 밝혀 화제가 됐다. ‘그런 표정으로 서 있지 말고 옆에 풀이나 뽑아라. 나의 마지막 계획이었다.’ 나도 죽기 전에 유서까지는 못 써도 묘비명은 생각해둘까 한다. 너무 구구절절하거나 흔하지 않게, 읽는 사람이 저절로 나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게, 가능하면 담백하게.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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