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9) 춘천 생활 정리하고 총신대 입학… 물정 몰라 군 재입대

임보혁 2024. 1. 2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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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후반 당시 서울 남산 아랫자락에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큰 신사(神社)가 있었다.

당시는 한국 정부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고 미국이 군정을 실시할 때였다.

당시 미군의 하지 중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또 당시 제2대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께서 재임 중이셨는데 그분이 바로 내가 어렸을 적 고향 교회에 부임하신 장형일 목사님 서재에서 봤던 '신학난제선평'의 저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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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출석 교회 장로님 권유로 입학
기숙사 들어가 거처 문제까지 해결
본과 때 입대 소집통지서 다시 받고
복무하지 않아도 될 군 생활 또 시작
1953년 당시 총회신학교의 경건 훈련과 심령부흥회 모습. 총신대 제공


1950년대 중후반 당시 서울 남산 아랫자락에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큰 신사(神社)가 있었다. 서울역에서 회현동을 거쳐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200여개의 계단을 오르면 신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 신사에서 쓸 제사 음식을 만들던 건물이 하나 있었다. 당시는 한국 정부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고 미국이 군정을 실시할 때였다. 남한에 머물던 장로교 목사님들은 이 건물을 신학교로 활용하고 싶었다. 당시 미군의 하지 중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목사님들은 하지 중장에게 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있으니 남한에도 신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결국 그곳에 현재 총신대의 전신인 총회신학교가 세워졌다.

1955년 춘천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온 나는 그렇게 총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춘천제일장로교회에서 나를 무척 아끼셨던 장로님의 권유도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평범했다. 첫째 혈혈단신 남한에 내려온 난 ‘의식주’가 아니라 ‘주식의’ 즉, 잘 곳이 우선 있어야 했다. 당시 학교는 서울 용산구 도원동의 ‘적산가옥’을 매입해 기숙사로 쓰고 있어 거처는 문제없겠다 싶었다. 둘째는 목사가 되면 주일성수는 당연히 지켜야 할 테니 예수 믿기 좋다고 생각했다. 영혼 구원이라는 거창한 소명은 사치였다.

또 당시 제2대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께서 재임 중이셨는데 그분이 바로 내가 어렸을 적 고향 교회에 부임하신 장형일 목사님 서재에서 봤던 ‘신학난제선평’의 저자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게 ‘박사’의 꿈을 꾸게 해주신 분이다. 박 박사님 같은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일까 싶다. 이는 내가 늘 마음속에 ‘여호와 이레’, 미리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 외쳐온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총회신학교 학제는 예과 2년, 본과 3년, 별과 3년이었다. 예과 재학 시절에는 철학 심리학 법학 등 오늘날 대학의 인문학 과정을 배웠는데 이때 배운 공부는 훗날 큰 유익이 됐다. 당시 철학을 가르치신 한철하 교수님을 비롯해 교수진 모두 학문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시간이 흘러 43년 후 부족한 내가 한 교수님 후임으로 아세아연합신학대 3대 총장으로 재직하게 됐으니 하나님께 그리고 한 교수님과 이사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57년 7월 신학교 예과를 마치고 본과 한 학기를 마칠 즈음 군에 입대하라는 소집통지서를 받게 됐다. 처음 남한으로 넘어오며 나름 군 생활을 했기에 또 복무하지 않아도 됐지만, 잘 몰랐던 나는 그렇게 또다시 군에 입대하게 됐다. 3년의 군 생활이 또 시작된 것이다. 기초 군사 훈련을 받고 공병부대로 배치됐다. 경남 김해로 이동해 공병 훈련을 받았다. 말 그대로 돌을 깎아 건물을 짓는 등 힘든 훈련의 연속이었다.

당시 군부대는 불합리한 일이 너무 많았다. 한 번은 소속 중대장이 부대원들에게 개구리를 잡아 오라고 시킨 적이 있다. 왜 잡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명령에 따라 전우들과 개구리를 잡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대장의 아내가 아파서 우리가 대신 그분의 몸보신용 재료를 구하게 시킨 것이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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