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 신세 국립중앙도서관 [신준봉의 시시각각]

신준봉 2024. 1. 26.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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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논설위원

움베르토 에코, 밀란 쿤데라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아르헨티나의 시인·소설가 보르헤스(1899~1986)는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항상 천국을 일종의 도서관으로 상상해 왔다." 50대 중반에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됐지만 작가로서는 치명적인 시력 상실이 동시에 닥친 자신의 처지를 훗날 되돌아본 한 강연에서다. 수십만 권의 '장서'와 그것들을 읽을 수 없는 캄캄한 '밤'이라는, 신이 선사한 두 개의 선물이 서로 모순된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덧붙이면서다.

보르헤스 얘기를 불쑥 꺼낸 건, 70년 전 아르헨티나 작가에게 천국이었던 도서관이 21세기 한국의 이용자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특히 도서관을 운영하고 발전 계획을 세우는 도서관인들이 그렇게 느낄 것 같다. 공공도서관 숫자나 도서관 1관당 사서 숫자 등 외형은 꾸준히 성장세지만 정작 내실을 다지는 데는 정부가 무심해 보여서다.
알려진 대로 국가 대표 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장 자리가 전임 서혜란 관장 이후 2022년 9월부터 1년5개월째 공석이다. 5년마다 도서관발전종합계획을 수립하는 국가도서관위원회 사정은 더 딱하다. 2022년 4월 신기남 위원장 이후 1년10개월째 위원장이 없다.

지난 10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한국도서관협회 관계자 등과 간담회를 하는 장면. 도서관인들은 이 자리에서 국립도서관장을 하루 속히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연합뉴스


중앙도서관의 경우 그동안 관장 공모를 안 했던 건 아니다.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6월 첫 공모를 했지만 불발됐다. 이후 두 차례 더 공모 절차를 밟았으나 뽑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특정 인사를 뽑고 싶었으나 연거푸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음모론까지 나온다. 관장이 공석인 사이 중앙도서관은 위축됐다. 3개 부서 가운데 지식정보운영부 부장 보직이 사라졌다(지난 17일 입법 예고한 '문화체육관광부와 그 소속 기관 직제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안'). 중앙도서관이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고 자평하는 국가지식자원공유서비스를 총괄하던 자리다. 중앙도서관이 디지털화한 300만 권의 원문을 2400여 개 협약 도서관에서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서비스다. 지방의 800여 개 작은 도서관까지 사실상 300만 장서를 갖춘 효과가 난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디지털 플랫폼 정부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한국도서관협회 곽승진 회장).

「 1년 5개월째 관장 자리 비어 있어
국가도서관위원장도 나란히 공석
AI 시대일수록 도서관 중요한데…

국가도서관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시해 만들어졌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힘이 실리지 않았고, 정작 문재인 정부 때도 위원장이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특수·전문·학교도서관 등 다양한 도서관을 관할하는 정부 부처가 제각각이다 보니 포괄적인 업무 조정을 위해 위원회가 대통령 소속이어야 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그동안 유명무실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다. 더구나 현 정부는 '위원회 공화국' 정비를 위해 도서관위원회를 문체부 소속으로 돌릴 방침이다. 관련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법 통과에 반대한다면 대통령 소속이지만 화끈한 지원이 없는 찬밥 신세가 지속될 것이다.

관장이 없다고 도서관 업무가 마비되지는 않는다. 큰 문제 없이 돌아가는 것 같은 우리 국립중앙도서관이 그 증거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이 고도화될수록 도서관의 효용이 점점 떨어지는 건 아닐까. 부산대 이용재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우주 크기로 정보의 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믿을 만한 정보자산을 정선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도서관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서 출신의 한 지자체 도서관장은 "국가적 난제들인 사회 양극화나 기후변화, 저출산 문제도 도서관을 매개로 개입할 수 있다"고 했다. 도서관에서는 어떤 주제든 독서와 관련 실천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가령 아이들에게 태양열 전지에 관한 책을 읽히고 실제로 만들어 보게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미래에 어떤 도서관을 가질 것인지를 두고 어떤 합의하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관한 문제다. 그럴 때 중앙도서관장 공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신준봉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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