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직격인터뷰] “국회 다수 의석 확보 때까지 개혁 미루면 백년 가도 못해”

서경호 2024. 1. 2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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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학자 전주성이 제시하는 ‘개혁의 정석’


서경호 논설위원
“개혁은 어렵다. 확실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면 알려고 해야 하는데 다들 안다고 생각하니까 문제를 못 푸는 것이다.”

재정학자인 전주성 이화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신작 『개혁의 정석』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교육·인구·노동·연금·조세·정부개혁의 성공 공식’이라는 야심 찬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다들 모르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난제에 나름의 실천적 해법을 제시한다. 2022년 대선 직전에 썼던 책 『재정전쟁』처럼 흔히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주장이 많아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개혁의 골든타임은 정권 초기’라든가 ‘보수의 개혁은 감세가 필수다’ 같은 우리의 상식이 잘못됐다며 ‘발상의 전환’을 주문한다. 개혁에는 돈이 필요하고 재정의 힘과 시장의 힘을 이용해야 개혁에 동력이 생긴다고 했다.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 중도 지지 얻으면 의회 소수당도 개혁 위한 정치적 타결 가능
정권 초기가 ‘개혁의 골든타임’? ‘정권 이어가는 개혁’이 중요
무능한 보수정부는 복지 확대 찬성하지만 증세 기조엔 반대
연금개혁은 우선순위 정해 하나씩…보험료 인상부터 추진을

‘청사진, 여론 지지, 정치적 타협’ 중요

전주성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전 교수는 “여당이 의회 소수당이라도 잘 만들어진 청사진을 바탕으로 압도적 다수의 우호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면 개혁 과제를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했다. 김종호 기자

Q : 책에서 개혁의 세 가지 성공조건으로 ‘청사진, 여론 지지, 정치적 타협’을 꼽았다. 윤석열 정부도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공언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A : “개혁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청사진, 전략, 동력이 안 보인다. 그저 부처나 위원회가 부분적 사안을 나눠 맡는 백화점식 방식이다.”

Q : 개혁의 청사진에 담을 내용은.
A : “미래 비전이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무엇이 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목표가 구체적이고 단순해야 힘을 받기 쉽다. 정책 자원을 어떻게 동원하고 배분할지 정하고 목표와 우선순위도 설정해야 한다. 교육·인구·노동·연금 등을 총괄하는 국가인적자원위원회 같은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 정책 결정과 자원 배분에 실권을 주면 좋겠다.”

Q : 외환위기 때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수동적 개혁이었지만 김대중 정부 때 개혁을 많이 이뤘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는 자발적인 구조 개혁을 가장 많이 구상한 정부라고 했던데.
A : “DJ 정부 개혁은 목표가 분명했고 수단도 구체적이었다. 수동적인 개혁이어서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치렀다는 평가도 있다. 노무현 정부는 지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 수도 이전을 추진했고, ‘비전2030’이라는 복지 비전을 내놨다. 수도 이전은 우여곡절 끝에 행정도시 세종시 탄생으로 이어졌지만 국력 소모가 컸다. 일방적인 ‘대못 박기’ 대신 공론화 과정을 제대로 거쳤다면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비전2030도 재원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에 막연한 보고서 수준에 그쳤다. 재원 확보를 먼저 생각하고 복지 비전을 다음에 놓은 식으로 우선순위를 바꿨다면 결과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의회 다수당인 야당에 밀려 제대로 할 일을 못 한다고 하소연해왔다. 그런 면이 있긴 하다. 야당의 거부권 정치는 반대를 위한 반대, ‘비토크라시(vetocracy)’라는 비판이 없지 않다. 그런데 전 교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우호 여론을 등에 업으면 설사 의회 소수당이라도 정치적 타결이 가능할 수 있다”고 썼다. “막연히 선거를 통해 다수 의석을 확보할 때까지 개혁을 미룬다는 식의 소극적 태도로는 백년이 가도 무엇 하나 이루기 어려울 수 있다. 설사 여당이 의회 다수석을 가졌더라도 여론의 뒷받침이 없으면 개혁의 추진력은 사라진다.” 이런 지적은 현 정부가 귀 기울일 만하다. 전 교수가 제안하는 개혁의 각론을 들어봤다.

교육개혁, 청사진 만들어 차기 정부로

Q : 최근 여야가 경쟁적으로 저출생 대책을 발표했다.
A : “예산을 무한정 사용하면 출산율을 쉽게 높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재정자립도가 15% 안팎에 불과한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현금을 지원하는 건 국가 차원에서 최악의 선택이다. 전체 출산율을 높이기보다 인근 지역 출산율을 낮춰 효과가 상쇄된다. 저출산은 국가적 과제니까 지자체의 무분별한 현금 지원을 줄이고 중앙정부가 총괄할 필요가 있다. 한시적으로 파격적 유인책을 쓰면서 구조적 변화도 도모해야 한다.”

Q : 교육 개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A : “부분 개편만 하니 제도는 더 복잡해지고 입시의 불확실성만 커졌다. 현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기존 제도를 바꾸지 않고 좋은 청사진만 만들겠다는 취지의 ‘교육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 임기 중에 다수 여론의 지지를 받는 사회적 합의안을 만든 다음, 이를 깨끗하게 다음 정권에 넘기는 게 바람직하다. 현 정부와 차기 정부 모두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는 상책이다. 점수 기반의 내신 상대평가를 없애고 수능은 자격시험으로 만들고 대학에 학생 선발 자율권을 줘야 한다.”

Q : ‘더 내고 덜 받는’ 또는 ‘더 내고 좀 늦게 받는’ 연금개혁은 현실성이 없다고 했다.
A :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연금은 정치문제인데 경제문제로만 풀려고 하니 벽에 부딪히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연금 수급 개시연령을 늦추는 건 지금 꺼내기보다 아껴둬야 할 옵션이다. 연금 보험료 인상과 연금 수령을 늦추는 것을 동시에 시도하는 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저항의 강도만 높이는 하책이다. 우선순위를 정해 한 번에 하나씩 고치자. 지금은 보험료 인상에 집중할 때다.”
세대통합 기금으로 청년층 지원을

Q : 보수는 국민연금의 재정안정성을 높여 기금 고갈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 하고, 진보는 소득 보장 없는 개혁은 무의미하다며 소득대체율(생애평생소득 대비 노후에 수령하는 연금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A : “특별기금 형태의 ‘세대통합기금’ 조성을 제안한다. 조세 저항과 세대 갈등을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다. 연금보험료 인상분 일부를 보조금으로 지원하되, 중장년층보다 청년층에 더 유리하게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런 ‘세대 간 이타주의’에 기반한 해법이 가장 유용하다.”

Q : 세대통합기금은 어떻게 만드나.
A : “국내총생산(GDP)의 1%에 해당하는 한 해 평균 20조원을 10년에 걸쳐 모아 200조원을 마련해 보험료 인상분의 일부를 보조해주는 식이다.”

Q : 복지 포퓰리즘을 좌파세력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관행을 비판했다.
A : “지금은 진보건 보수건 복지 확대 자체를 반대하기는 어렵다. 재원 확보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무능한 진보 정부는 적자 재정을 해서라도 복지 지출을 늘리겠다고 나선다. 반면 무능한 보수 정부는 복지 확대는 찬성하지만 증세 기조에는 반대한다. 결국 두 정부 모두 정부 재정을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유능한 정부가 집권한다면 지금처럼 적극적 정부 역할이 필요한 시대에 수십 년 전 유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작은 정부 논리에 사로잡혀 무모한 감세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을 거다.”
‘세수 확대형 균형재정’으로 가야

Q : 시대 조류에 부합하는 재정 기조를 강조했는데.
A : “보수 이념의 집권당이 시대 조류와 어긋나는 재정 기조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2022년 9월 취임했던 영국의 트러스 총리는 적자 재정이 지속되는데 감세 정책을 추진하다 시장의 반격을 받고 역대 최단명 총리의 불명예를 안고 퇴진했다. 반면 19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감세 정책은 구조적 재정적자를 초래했지만 시장의 역습을 받지 않았다. 무능한 큰 정부보다 정부 개입을 자제하는 작은 정부로 향해 가던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 이념이 아니라 얼마나 믿을 만한 정부냐가 중요하다. 결국 정부 신뢰도가 시장의 심판을 가르는 잣대다. ‘세수 확대형 균형 재정’이 우리의 최적 선택이다.”

Q : 윤석열 정부가 법인세 최고세율을 3%포인트 내리는 감세를 추진했다가 국회에서 1%포인트 인하로 결정됐다.
A : “감세 취지는 좋지만 방법은 달라야 했다. 미국 같은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법인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세수 감소 효과가 큰 세율 인하보다는 투자 유인에 집중해 유효세율을 낮춰주고 규제개혁으로 기업 활력을 높이는 게 시대 조류에 맞고 보수 정권의 정체성도 살리는 길이다.”
‘임기 내 마무리’ 조바심 없어야

그의 제안 중에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긴 호흡으로 개혁하자는 대목이었다. 어느 정권이나 하기 힘든 선택이겠지만 그래도 이 길이 옳다고 믿는다. 이런 내용이다. “정치적 저항이 강하기 마련인 개혁과제는 힘 있는 정권 초기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틀린 얘기다. 개혁의 골든타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청사진 하나만 제대로 만들어 ‘정권을 이어가는 개혁’의 단초를 놓은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업적이 될 수 있다. 지난 수십년, 개혁 같은 개혁을 본 적이 없었던 데에는 임기 내에 뭔가 마무리를 해야만 자신의 업적이라 여기는 이기적인 조바심이 한몫했다.”

◆전주성=1957년생. 서울대 경제학과(74학번)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마틴 펠드스타인과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가 그의 지도교수였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으며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한국재정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며 개도국에 재정정책을 조언해왔다. 교수 퇴직 후에는 ‘한국형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DPI(발전패러다임연구소)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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