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은 왜 보수 정당에 표를 던지나

김남중 2024. 1. 25.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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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공들여 읽어볼 만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라는 질문이 대표해온 사회적 약자들의 강도 높은 체제 지지와 변화에 대한 저항은 사회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달려온 주제였다.

또 사람들은 다른 선택지나 대안이 없을 때에만 현 상태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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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체제 정당화의 심리학
존 T. 조스트 지음, 신기원 옮김
에코리브르, 552쪽, 3만5000원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23일 뉴햄프셔주 런던더리 유세에서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 트럼프 현상은 ‘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뉴시스AP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공들여 읽어볼 만하다. 중요한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장난 세상에서 왜 싸우는 사람들이 다수가 아닌가? 사람들은 왜 저항보다 순응을 택하는가?

지배 집단 구성원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동기화되고, 피지배 집단 구성원은 현 상태가 정당하지 않다고 지각하면서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데 동기화된다는 게 일반적 관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일들이 무수히 일어난다. 가난한 미국인들이 건강보험을 제공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않고, 빈곤층이 경제적 재분배나 복지에 반대하는 경우도 많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라는 질문이 대표해온 사회적 약자들의 강도 높은 체제 지지와 변화에 대한 저항은 사회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달려온 주제였다. 미국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로 사회·정치행동을 연구하는 존 T. 조스트(사진)의 책 ‘체제 정당화의 심리학’은 그 이유를 ‘체제 정당화’라는 사회적·심리적 과정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경제·정치 체제의 여러 측면을 방어하고, 강화하며, 의존하도록 동기화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경제·사회·정치적 배치(체제)를 인정하고 합리화·정당화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행복감을 높이고 불확실성, 위험, 사회적 부조화를 줄이려는 욕구를 만족시킨다. 특히 체제 정당화는 비주류 집단 구성원에게서도 많이 발견되며 고단한 현실에 대한 진통제 기능을 한다.

그동안의 사회과학 이론은 이익이나 정체성 등을 중심으로 집단 행동을 분석해 왔다. 또 사람들은 다른 선택지나 대안이 없을 때에만 현 상태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이 책이 소개하는 체제 정당화 이론에서는 현 상태의 정당성을 의문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합리화하는 강력한 사회적·심리적 과정이 존재한다고 보고, 이것이 사회·정치 행동의 또 다른 동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인 조사 결과를 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서도 백인을 우호적으로 보는 반흑인 인종 편향이 확인된다. 동성애자 대상 조사에서는 37.5%가 이성애자에 대한 암묵적 선호를 나타냈다. 2003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 결정을 발표한 뒤 침공에 대한 미국인의 지지가 증가했다거나, 도널드 트럼프 취임 직후 민주당 지지자에게서도 트럼프 지지가 늘어났다는 것도 체제 정당화가 작동하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체제 정당화 이론을 종합한 이 책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이나 집단 정체성에 반하더라도 현재의 체제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음을 입증하면서 기존의 사회심리학을 확장한다. 특히 비주류 집단 구성원들의 계급 배반 투표에 대해 유력한 설명을 제공한다.

체제 정당화 과정은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강화된다. 정치·경제 권력의 조작이나 강압 때문만은 아니다. ‘공정한 시장’ ‘성공은 능력 때문’ ‘평등은 악’ 같은 고정관념, ‘가난하지만 행복한’ ‘성공했지만 비도덕적인’ 같은 보완적 고정관념, 정치·경제적 보수주의 등이 영향을 미친다. 무력감이 권위와 위계의 정당화를 촉진하며, 종교 또한 체제 정당화와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

체제 정당화라는 개념은 도덕적 분노가 왜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지, 사회적 패배자들에게서 왜 분노와 저항이 놀라울 만큼 드물게 나타나는지, 비주류 집단 구성원이 왜 종종 사회정의 운동을 앞장서 막는지 설명해준다.

기후변화 회의론을 체제 정당화 이론으로 분석한 대목도 흥미롭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후과학자들이 기후변화의 원인, 결과, 양상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이 문제를 둘러싼 이념적 양극화는 낮아지기보다 높아졌다.

저자는 체제 정당화 성향이 높은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더 회의적이라는 여러 조사 결과를 보여주며 현 체제를 정당화하려는 동기가 기후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요인 중 하나라고 밝힌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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