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문학, 한 세기 넘어 독자와 만난다

김남중 2024. 1. 2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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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정본 전집 1차 출간… 전 14권 목표
北 발표 제외 월북 전 작품 수록
옛 어휘·지명 등 각주 달아 해설
서울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1940년대 초 상허 이태준의 모습. 수연산방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화당 제공


상허 이태준(1904-?)은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당대 최고의 단편소설과 미문을 남긴 문장가로 문장론의 고전 ‘문장강화’나 수필집 ‘무서록’은 지금도 읽힌다. 이태준이 살던 서울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은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태준은 1925년 등단해 20여년 동안 많은 작품을 썼고, 1946년 8월경 월북 후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대 중반 숙청당한 뒤 행적이 묘연해졌다. 이태준의 작품은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이후에야 출판되기 시작했고 몇몇 전집들도 발행됐다. 하지만 작품이 발표된 시기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라서 원본에 충실하고 흩어진 작품 전체를 포괄한 정본 전집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이번에 나온 열화당의 ‘상허 이태준 전집’은 이태준의 생질(여동생의 아들)인 김명열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도해 8년여 만에 결실을 낸 것으로 ‘상허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본문을 확정한다’는 것을 제1원칙으로 내세웠다. 다만 ‘상허의 월북 전 작품을 모두 모은다’는 또 다른 발간 원칙에 따라 이태준이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은 제외했다.

이태준은 최초 발표본 이후 단행본 수록본, 선집 수록본 등 재발표본에 따라 개작을 많이 했는데, 월북 이전 마지막 판본에 작가의 최종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저본으로 삼았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 개고된 작품들 중에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정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발견되었고, 이 경우는 최초본에 따라 복원한 뒤 주석을 달았다.

편집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부분은 ‘편집자 주’다. 문학 작품이지만 각 권마다 적게는 500여개, 많게는 1400여개에 이르는 주석이 각주 형식으로 들어가 있다. 옛 어휘, 일어나 한문, 인물, 지명, 사건 등을 꼼꼼하게 해설했고, 의미가 모호한 것은 ‘추정’이라고 밝히고 풀이해 놓았다. 또 거의 한 세기 전에 쓰여진 작품을 지금의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현행 표기법으로 고치되 방언이나 당대의 표현, 독특한 입말 등은 그대로 살렸다.

‘상허 이태준 전집’은 전14권으로 구성된다. 1권은 상허의 단편소설들을 모두 수록한 ‘달밤’이고, 2권은 중편소설, 희곡, 시, 아동문학을 모은 ‘해방 전후’이다. 3∼10권은 장편소설들로 ‘구원의 여상’부터 ‘별은 창마다’까지 13편을 묶었다. 11권은 수필과 기행문 모음인 ‘무서록’, 12권은 ‘문장강화’, 13권은 ‘평론·설문·좌담·번역’이다. 마지막 14권은 상허의 어휘들을 예문과 함께 정리하고 상허 관련 자료를 취합한 ‘상허 어휘 풀이집’이다.

이 중 1∼4권이 1차분으로 출간됐다. 전집을 시작하는 1권으로 단편집을 선택한 것은 이태준 문학의 정수가 단편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가들의 직업이 아니라 작가들의 예술을 보려면 아직은 단편을 떠나 구할 데가 없다”고 했는데, 단편을 가장 순수한 글쓰기의 결실이자 작가 고유의 미의식이 온전히 발현되는 형식으로 보았다. 1권은 1925년 등단작 ‘오몽녀’와 대표작인 ‘달밤’을 비롯해 최초 공개되는 ‘동심예찬’까지 55편의 단편을 수록했다.

‘달밤’은 12쪽 분량의 짧은 소설이다. 이사한 성복동 집을 찾아오던 신문배달부 황수건이라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인데, 황수건이 겪는 불행을 그의 천진하고 무해한 성정과 대비시키며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에 대한 전형적 시각을 돌아보게 한다. “그는 길을 보지도 않고 달만 쳐다보며, 노래는 그 이상은 외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담배를 다 퍽퍽 빨면서 지나갔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1933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 시대 가난한 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편소설 5편, 희곡 2편, 시 9편, 아동문학 35편을 묶은 2권은 상허 문학에서 주목이 덜했던 작품들이다. 휘문고보 시절인 1922년 ‘학생계’에 발표한 시 ‘누나야 달 보렴’과 ‘한강 꿈’은 이태준의 글이 세상과 처음 만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는 소설보다 동화를 먼저 썼으며, 1930년대 ‘학생’ ‘어린이’ 같은 잡지에 관여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글도 많이 남겼다. 월북 직전에 발표한 중편소설 ‘해방 전후’는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해방공간의 혼돈과 자기반성을 반영한 자전적 작품이다.

3권과 4권에 실린 장편소설들은 1930년대 신문, 잡지에 연재한 작품들이다. 이태준은 연애소설의 형식 속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냈고, 흔히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는 대중문학의 통속성에 대해서도 재인식을 요구했다. 그는 “통속성이란 곧 사회성”이라며 “통속성 없이 인류는 아무런 사회적 행동도 결성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열화당 ‘상허 이태준 전집’ 출간으로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간직한 이태준 문학은 한 세기를 넘어 현대의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우리 근대문학을 현대의 고전으로 구성하는 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열화당은 내년에 5∼8권을 내는 등 2028년까지 전집 출간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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