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경제 한심" 김정은 격노 뒤엔 '경제난' 고민...군까지 동원 '긴급 처방'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방의 열악한 경제 상황을 부각하며 '인민생활 개선을 위한 지방공업 발전'을 지시했다. 공개적 질책이라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실상은 북한 경제난 가속화를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분석이다.
김정은 "지방에 생필품조차 제공 못 해"
노동신문은 2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8기 19차)가 지난 23일부터 24일까지 김정은 주재로 열렸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특히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와 낙후된 지방경제 수준을 지적했다.
그는 "지방 인민들에게 기초식품과 식료품, 소비품을 비롯해 초보적인 생활필수품조차 원만히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며 "지금 전반적인 지방경제가 초보적인 조건도 갖추지 못한 매우 한심한 상태"라고 말했다.
특히 간부들을 향해선 "말로 굼때고 있었다"며 "당 중앙은 지방 발전 정책 집행 정형을 놓고 도·시·군당 책임 비서들의 당성·인민성·책임성에 대하여 평가할 것"이라며 공개 비난했다. 이번 회의에는 정치국 상무위원 이하 정치국 소속 간부들이 모두 참가했다.
김정은이 농촌진흥과 함께 지방공업의 발전을 수행하기란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면서도 "하지만 나는 이것을 하자는 것이다. 반드시 할 수 있으며, 또 할 것이다. 해야만 한다"고 강조한 대목에서는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김정은은 앞서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국회 격) 시정연설에서 '지방발전 20×10 정책'을 내놨는데, 앞으로 매해 20개 군에 현대적인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해 10년 안에 전국의 모든 시·군과 인민들의 '물질문화 생활 수준'을 높이는 게 목표다. 이번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지방발전 20X10 정책'의 경제 실무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분과별 연구는 물론 관련 협의회까지 신설됐다는 게 신문의 설명이다.
김정은이 이처럼 지방공장 건설에 목을 매는 건 핵·미사일 개발에 국가 역량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도·농 및 산업 간 기형적으로 발전 격차가 벌어지는 데다 국제사회의 제재 등으로 4년차에 들어선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도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간부들을 때리며 지방 경제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애민 지도자' 이미지를 연출하는 셈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기본적으로 핵능력 고도화에 기반을 둔 국방력 증대와 지방경제 재건을 통한 주민생활 개선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며 "이면에는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내부결속을 도모하고 제한된 내부 자원을 원활하게 동원하려는 노림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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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건 군대 뿐'
김정은은 이를 위해 군 동원까지 지시했다. 신문은 '지방공업혁명을 일으킬 데 대한 당 중앙위 정치국 확대회의 결정 관철 투쟁에 인민군 부대들을 동원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명령서에 김정은이 친필로 서명했고,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명령서가 전달됐다고 전했다.
김정은이 군을 전면에 내세운 건 지방공업 발전을 핵심 국정과제로 꼽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북한은 '하노이 노 딜'(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자력갱생을 강조하면서 내부 고삐를 죄는 일종의 비상 경영 체제를 가동하고 있는데, 주요 고비마다 군(軍)을 동원해 급한 불을 끄고 있다.
이 역시 내부적으로 민심을 다잡아 국정 동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방공업 재건을 위한 사업에 군을 동원했다는 건 내부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이라며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주민생활을 발전시켜야 하지만, 비핵화와 같은 근본적인 노선변화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미봉책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신냉전' 틈새 노렸나?
북·러 간 밀착이 심화하는 가운데 김정은이 이를 기회로 삼아 제재로 막혀 있는 외부 투자 등에서 우회로를 찾으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은은 지방 공장 입지와 관련해 "전기와 공업용수 보장을 비롯해 공장 운영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가, 수송에 유리한가 하는 것을 잘 타산해야 한다"고도 언급했는데, 굳이 '수송'을 언급한 건 외부와의 협력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북·러 양국이 지난해 9월 정상회담 이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방북(10월), 북·러 경제공동위원회(11월·평양) 개최, 연해주 정부대표단 방북(12월), 최선희 외무상 방러(1월) 등을 이어가면서 전방위로 협력을 확대하는 것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는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기본적으로 중·러가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국제정세와 코로나19로 폐쇄됐던 국경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며 "노동력이나 자원 동원을 강조했던 선대와 달리 기술혁신이나 국산화를 강조하는 '김정은식 자력갱생'을 지방까지 확산시키려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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